토마토가 만난 사람 노래하는 사람 이애영
토마토가 만난 사람 노래하는 사람 이애영
  • 글 사진 이수연
  • 승인 2013.12.06 1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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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매고, 노래하며 산다

청바지를 입고, 라이브 카페에 간다. 통기타를 어깨에 메고 노래하는 가수의 음악을 들으며 오란씨 한잔을 마셔도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텔레비전보다는 라디오를 즐겨들었고, 대중가수보다는 통기타 치며 노래하던 가수들을 더 흠모하던 7~80년대 젊은이들. 그들은 이제 나이가 들었고, 그들이 즐기던 문화는 차츰 사라졌다. 최근 텔레비전에서 ‘쎄시봉’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당시 유명했던 통기타 가수들이 하나씩 대중 앞에 서기 시작했다. 그때 쎄시봉과 함께 통기타의 산실로 불리며 노래 좀 한다는 젊은이들이 모였던 곳이 하나 더 있었다. 지난 5월, 세상을 떠난 방송인 이종환이 운영하던 음악실 쉘부르가 그곳이었다.
▲ 이애영
삶을 바꾸었던 서울 나들이
70년대 초, 이애영 씨는 이십대 초반이었다. 놀기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던 그녀. 노래 좀 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가수를 꿈꿔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전에서 심심한 시간을 보내다가 서울로 대학 간 친구를 따라 당시 유명했던 라이브 카페인 쉘부르로 갔다. 300원을 내면 입장권과 오란씨 한잔을 마실 수 있었다. 한참 놀고 있는데, ‘행운권 추첨’을 한다고 MC 허참이 나왔다. 지금은 꽤 유명한 방송인이지만, 그때는 허참도 무명이었다. 허참이 부른 행운의 번호는 이애영 씨가 가지고 있던 입장권에 쓰여 있었다.

쑥스러워 친구를 대신 내보냈는데, 오늘 재미있었느냐는 허참의 질문에 “제 친구보다 다들 노래를 못해요.”라고 대답한 친구 때문에 이애영 씨가 무대에 올랐다.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이종환 씨의 눈에 띄었다. 이종환 씨는 그때 여자 가수로는 많지 않았던 허스키한 이애영 씨의 목소리에 끌려 그녀를 캐스팅했다. 그때부터 이애영 씨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1970년대 초, 음악실 쉘부르에서 가수를 꿈꾸며 노래 부르던 사람은 꽤 많았다. ‘이종환 사단’이라고 불리던 음악실 쉘부르는 7~80년대 유명가수를 많이 배출했다. 음악실 쉘부르에 들어오려면 오디션에 합격해야 했다. 이애영 씨는 이종환 씨의 눈에 들어 낙하산처럼 들어간 특이한 경우였다. 그때 이종환 사단에 있었던 가수로 어니언스, 김세화, 쉐그린 등이 있다. 지금은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때를 주름잡던 가수들이다.

통기타를 매고, 음악실 쉘부르로 출근하던 그때
“그때 우리는 이종환 씨를 대장님이라고 불렀어요. 거기서 다들 해바라기처럼 이종환 씨만 바라보면서 노래했죠. 음반 낸 사람도 꽤 있었지만, 그냥 무명으로 몇 년씩 쉘부르에서 노래만 부르던 사람도 많았어요. 가수 하고 싶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있다는 걸 거기서 처음 알았죠.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이종환 씨 소문도 많고 말도 많지만, 그 사람이 음악을 대하는 열정 하나만큼은 알아줘야 해요.”

음악실 쉘부르에서 가수를 꿈꾸던 사람들은 정시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하며 노래연습을 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날은 노래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이애영 씨도 그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쉘부르에서는 활동하는 사람 중 몇 명을 뽑아 ‘쉘부르 기획작품집’이라는 앨범도 만들었다. 이애영 씨는 그곳에서 노래한 지 3개월 만에 앨범에 참여했다. 이애영 씨보다 먼저 쉘부르에 들어왔어도 앨범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부러움도 많이 샀다. 그것 또한 이종환 씨의 특별 배려 덕분이었다. 이종환 씨는 자신이 직접 캐스팅한 이애영 씨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이애영 씨의 목소리를 특별히 아꼈던 것이다. 노래가 좋아서 노래를 불렀지 가수로 유명해진다거나 하는 것에는 큰 욕심이 없었던 이애영 씨였다. 그래도 앨범에 참여하고 나니 조금씩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어딘가에 속해 있는 생활이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냥 대전으로 내려왔다.

“제가 원래 어디 얽매이는 것을 싫어해요. 그냥 내려와서 며칠 있다가 이종환 씨한테 편지를 썼죠. 이만저만해서 대전에 내려왔다고, 죄송하다고요. 그러니까 며칠 후에 전보가 왔어요. ‘같이 고생합시다.’라고 쓰여 있었죠. 마음 약해서 또 바로 서울로 올라갔어요.”

당시 음악실 쉘부르에서 노래하던 사람들은 출퇴근은 했지만, 보수는 받지 못했다. 이애영 씨가 다시 돌아오자 이종환 씨는 이애영 씨에게 티켓에 도장을 찍고, 모조지에 그날그날 출연진을 쓰는 잡다한 일을 시키면서 2만 원씩 월급을 줬다. 밥 한 끼씩을 쉘부르에서 먹고, 한 달에 2만 원을 받으며 다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배고파도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다시 대전으로 내려오다
1973년, 이종환 씨가 ‘이수미 자해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음악실 쉘부르의 종로 시대도 그때 마감했다. 이종환 씨가 풀려난 후 음악실 쉘부르의 명동 시대가 문을 열었다. 명동에서는 생맥주를 파는 음악실로 다시 태어났다.

“거기서 한동안 버텼는데, 도저히 술 마시는 데서 노래 부르는 것이 익숙해지지가 않더라고요. 집중하지도 않고, 취객들이 험한 말도 많이 하고요.”
당시만 해도 여자는 여자다워야 했다. 이애영 씨는 그때는 보기 드문 보이쉬한 스타일을 유지했다. 지금은 개성이라고 인정해주지만, 그때는 ‘퇴폐풍조’라고 해서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이애영 씨의 큰 키도 오해를 불렀다. 170cm, 여자 키로는 정말 큰 키였다. 취객들은 이애영 씨가 노래를 부르면 “남자냐, 여자냐.”부터 시작해 각종 시비를 걸었다.

“전국노래자랑에 나갔을 때 외모 때문에 1등 할 것을 2등 했어요. 외모 때문에 아쉽다면서 당시 MC 보던 분들도 말이 많았죠. 그런 시대였어요. 그때가.”
몇 개월을 버티다가 이종환 씨에게 대전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때는 이종환 씨도 붙잡지 않았다. 대전에 내려왔을 때가 70년대 후반이었다. 그때 대전에는 대전극장통에 있던 ‘PJ’, 충청은행 뒤쪽에 있던 ‘떼아뜨르’ 등 라이브카페가 유행했던 때였다.

그리운 그때, 진짜 낭만이 있던 7080
서울에 있을 때도 가끔 대전에서 부르면 내려와 공연하곤 했다. 계속 이어온 인연으로 여기저기서 노래할 수 있었다. 음악실 쉘부르 출신이라는 것도 활동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쉘부르’ 하면 알아주던 때였다.
“대전에 온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어요. 처음부터 욕심도 많이 없었고, 이종환 씨 배려로 앨범에도 참여했고, 라디오 방송도 몇 번 나갔잖아요. 내려와서는 라이브카페 여기저기서 노래도 하고, 그러면서 저도 라이브카페를 차렸죠. 라이브카페라고는 하지만, 작은 규모였어요. 노래하고 싶으면 노래하고, 눈치 볼 일도 없잖아요. 행복했죠.”

그때 대전에 통기타 가수가 거의 없었던 것도 이애영 씨가 활동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그렇게 노래하러 다니고, 라이브카페를 운영하다가 딱 한 번의 일탈도 있었다. 삶에 지치고, 사람에 지쳤던 때였다. 다 그만두고, 택시회사에 들어갔다.

“제가 운전을 잘해요. 차타고 다니면서 훌쩍훌쩍 떠나기도 잘하고. 원래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거든. 그래서 택시를 했지. 2007년인가부터였는데, 한 2년 했나 봐요. 매일 밤에 들어와서 새벽 3시 30분이면 나가서 운전했으니까. 힘들어서 노래도 못 했죠. 2년 정도 하다가 택시도 그만두고, 또 차끌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녔어요. 그때 아는 사람이 전화가 온 거야. 같이 라이브카페 운영하자고 꼬여서 또 장사를 시작했지.”

2009년에 정림동에 돌체라는 라이브카페 문을 열었다. 장사는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진짜 7080 문화를 되살려 보겠다고 이애영 씨와 동업자가 합심해 만든 카페였으나 이미 클럽문화나 부킹문화 때문에 많은 라이브카페가 퇴폐업소로 변질한 후였다.

“옛날처럼 순수한 7080 문화가 사라진 거죠. 앉아서 음악 듣고, 맥주마시고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때였는데, 이제는 7080 라이브카페 하니까 오는 손님들도 부킹하는 거나 말하더라고요. 한 2년 하다가 많이 손해 보고 그만뒀어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대전 중구 유천동에 있는 카페 섬은 2011년 11월에 문을 열었다. 섬이라는 이름은 정현종의 시 <섬>을 좋아하는 이애영 씨가 붙인 이름이다. 라이브 카페 돌체를 접고, 이애영 씨 혼자 유천동으로 정착한 것이다.
“이 시가 좋아서 ‘섬’ 관련된 책도 많이 봤어요. 사람들이 살면서 다 외롭잖아요. 그런 느낌이더라고요.”

카페 섬에는 이애영 씨가 노래하는 작은 무대도 있다. 가끔 이애영 씨는 가게 불을 다 꺼놓고, 무대에만 불을 밝히고 혼자서 노래하곤 한다. 이애영 씨는 노래 부를 힘이 있을 때까지 노래하며 살고 싶다. 부르고 싶을 때 부르고,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고, 살 것이다. 이애영 씨가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아, 언제 또 만나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는 음악실 쉘부르 기획 작품집2에 실린 ‘언제 또 만나리’라는 이애영 씨의 곡이다. 살면서 말도 못하게 힘든 날도 많았다. 이렇게 살아 무엇하느냐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노래 부른 것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지금도 노래 부를 때가 제일 행복하니까. 살아보니까 참 별거 아닌데, 그때는 왜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별거 아닌 거에 집착하고, 별거 아닌 거에 매달리고. 원래도 많은 욕심 부리면서 살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 그래요. 그냥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노래하고, 그러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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