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행복한 삶 사이
대체로 행복한 삶 사이
  • 글 성수진 사진 김선정
  • 승인 2014.03.14 18: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토마토가 만난 사람

“대체로 행복하다고 느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행복하다고 느낄 경우가 아주 많아요. 어린 친구들을 만나면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고 말해요. 아내한테도 그렇게 얘기하죠. 아내는 농사를 지어요. 그런데 그림을 잘 그리거든요. 그림 그리라고 계속 꼬셨는데 그러면 또 자기를 꼬드긴다고 뭐라고 해요.”

‘유기농 펑크포크’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 음악을 하겠다며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시골 생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찾아 경남 산청으로 갔던 사람. 사람이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충북 괴산으로 평범한 생활을 찾아 나온 사람. 사이 씨를 남과 비교해 설명할 말이 많지만, 사이 씨는 사람의 삶은 대동소이하며 ‘거기서 거기’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이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냉동만두’
내가 부르는 노래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리로 치자면 냉동만두, 냉동만두 같은 거죠



록스타와 서울 사이, 시골 사이
2000년쯤이었을까. 사이 씨는 록스타가 되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길거리 밴드를 만들었다. 몇 년 활동하다 팀은 깨졌지만, 사이 씨는 밴드를 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함께 밴드 하는 한 멤버가 석유 문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자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에너지 문제에 관해 고민하게 됐어요. 그렇게 조금씩 관심이 퍼지더니 서울에 살기 싫더라고요. 막연히 서울을 떠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아내를 만났어요. 아내도 원래 혼자 시골에 가고 싶어 했던 사람이라 같이 가자고 했죠.”

불교계 환경단체에서 귀농 학교 간사로 일하며 귀농 학교 학생이었던 아내를 만났다. 아내와 함께 내려간 경남 산청과의 인연도 귀농 학교에서 시작됐다. 귀농 학교 강사 중 산청에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사는 이가 있었고 그 집으로 한 번 놀러 갔다가 그들이 사는 방식에 반했다. 세 가족 정도가 사는 곳,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집을 고칠 수 있었고 아이들은 홈스쿨링을 했다. 내다팔지 않고 가족이 먹을 만큼만 농사를 지었고 정치, 철학, 종교 등 여러 화제로 밤을 새워 이야기하는 게 자연스러운 삶이었다.

“아내와 산청에 내려가기로 하고 전화로 빈집이 있으면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 마침 빈집이 있대서 전화 끊기도 전에 바로 결정했어요. 처음에는 막막한 게 없었어요. 오히려 모든 게 명확했죠. 도시 사람들을 비웃으면서 ‘이런 멍청한 놈들, 나만 살아남겠다.’ 하면서 떵떵거리며 내려간 거예요. 세탁기, 냉장고도 없이 생태근본주의자로 자급자족을 꿈꾸면서요.”

빈집에 살기 시작한 지 1년을 채 못 넘겨 주인이 나가라고 해 어쩔 수 없이 땅을 샀다. 평당 만 원짜리, 800평 땅을 사 800만 원이 들었다. 그리고 아내와 둘이 집을 지었다. 흙벽돌을 찍어 말려서 기둥도 없이 정사각형으로 벽돌을 쌓아 집을 만들었다. 돈이 없어, 보통 집을 지을 때 두 겹 쌓는 벽돌을 한 겹만 쌓았다. 수돗물은 쓰지도 않았다. 흐르는 샘에 호스를 꽂아 기압 차로 물이 떨어지게 만들어 씻고 닦고 했다. 쌀은 사거나 얻어먹었고 밭농사를 지어 다른 먹을거리를 해결했다. 팔기 위한 농사는 짓지 않았다.

‘아방가르드개론 제1장’
농사로 돈을 벌려고 하면 머리가 아파
그냥 줄이고, 덜 쓰고, 가난해도 괜찮은 걸
아이가 태어나도 학교따윈 안 보낼 거야
뭐 나랑 같이 밭일 하고, 밴드하고, 산책하고
책이나 읽겠지 우우우



사람의 거울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

몇 가족이 한 주에 한 번씩 미술 모임, 글쓰기 모임, 음악 모임 등을 했다. 출판사를 만들어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이웃 아이들은 열 살 때 <월든>을 읽었다.

“우리 눈에는 우리만 잘 살고 있었죠. 실제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어요. 모이면 도시 사는 사람들은 멍청이라고 얘기했었죠. 그러다 여름에 자는데 반딧불들이 똑같은 이야기로 말을 걸어왔어요. 너는 왜 시골에 왔느냐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온 건데 왜 대단해지려고 하느냐고….”

2006년 말 산청에 와 3년 정도를 살다, 다시 다른 사람들,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곳을 찾아 충북 괴산으로 나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행복한 삶이란 생각이었다.

“사람이 없는 곳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었어요. 사람이 지구를 망친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람한테 받을 수 있는 건 동식물한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아니란 걸 깨달은 거죠. 사람의 거울은 사람일 수밖에 없더라고요.”

비어있던 한 학교 교장 사택에서 1년 정도를 살다, 한 폐가를 고쳐 살기 시작했다. 괴산에서 사이 씨 생활은 단조롭다. 최대한 빈둥대다가 아내의 잔소리가 시작되면 집 밖으로 나가 밭일을 한다. 산청에서와 같은 삶이 아닌 평범한 삶이지만, 지금도 도시 사람들보다는 돈을 적게 쓴다.

“아이폰 파이브 쓰고요. 김치 냉장고도 있고요. 도시인들과 다른 점은 시골에 산다는 거죠. 그거 빼고는 남들과 다른 점이 별로 없어요.”


‘착각’
나만 빼고 니네들은 모두 우물 안 개구리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믿는 것만이 진실
나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서, 착각따위는 하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인격 또한 아주 고매해서
그런 너희들을 모두 감싸 안는다
는 착각


다른 게 행복이 아니라
“유기농 펑크포크요? 제가 음악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떤 음악을 하는지 물어보잖아요. 일일이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지어낸 거예요. 형식은 포크이나 내용은 펑크라는 거예요. 유기농이 트렌드니 유기농이란 말을 붙인 거고요. 큰 뜻은 없어요.”

자급자족 하는 삶을 경험했고 사람이나 삶에 관해 고민하다 깨달은 것은 사람의 삶이 크게 보면 같고 사소하게 다르다는 것,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질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이다.

“지금 제 삶이 남들과 다른 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거예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돈까지 벌고 있다는 거예요. 비록 적은 돈이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아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만족합니다.”

2006년에 청산에 내려가 2007년, 첫 앨범을 냈다. 사람들에게 할 말이 많았다. 앨범 이름도 ‘아방가르드’다. 이 시대의 아방가르드가 무엇인지 내가 보여주겠다며 낸 자신감 가득 찬 앨범이다. 친구가 ‘네 노래를 집에서도 듣고 싶다.’라며 오디오 카드를 사줘 녹음한 앨범이다. 앨범을 내긴 냈지만, 유통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우연히 누군가의 ‘땜빵’으로 공연을 하게 됐고 그 무대를 본 기획자들이 사이 씨를 공연에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1년에 두 번째 앨범 ‘유기농 펑크포크’를 냈다. 제천 국제 음악영화제 거리의 악사 페스티벌에서 우승해, 지원을 받아 낸 앨범이다. 첫 번째 앨범을 내고, 두 번째 앨범을 내는 사이, 삶이나 음악을 바라보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다.

“그저 재밌어요. 제 연주와 노래에 사람들이 박수 쳐주면 기분이 좋아요. 그래서 하는 거예요. 돈까지 벌고, 짱이네.”


‘냉동만두’
진짜로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밥 딜런, 밥 말리, 존 레넌도 좋지만
부산 해운대 리베라 백화점 청소하시는
육숙희씨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노래



음악가 그리고 쓸모 있는 남편
“‘육숙희 씨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노래’가 제가 부르고 싶은 노래냐고요? 아니에요. 나쁜 노래들도 있어요. 살면서 여러 순간에 느끼는 여러 감정이 있잖아요. 한 노래를 만들 때는 그 감정에 집중하는 거죠. 어떤 날은 해 질 무렵, 한 꼬마가 흘린 공이 굴러가는 걸 보고 감명 받을 수도 있고요. 엄청나게 못된 짓을 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느낌에 집중할 수도 있고요.”

사소한 일상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눈여겨보지 않을 모습들을 찾아내는 것이 사이 씨가 생각하는 음악가의 삶이다. 일상의 장면에서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을 사진기로 찍듯 노래하고, 생활에서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듯 노래하는 것.

“사람들이 지금처럼만 불러주고 좋아해 주면 좋죠. 저는 지금이 정말 좋거든요.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고, 지금 정도만요. 이런 식의 음악을 계속 만들 수만 있으면 좋을 거예요.”
사이 씨의 행복한 삶에 음악이 있다. 그리고 가족이 있다. 사이 씨는 가정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는 가장이다.

“좋은 아빠인 것 같은데 좋은 남편은 아니에요. 아내한테는 좀 못하는 편이에요. 그게 저의 과제죠. 쓸모 있는 남편이 되는 것이요.”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충청뉴스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