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구도심에서 미래를 만나다
공주의 구도심에서 미래를 만나다
  • 엄보람 기자
  • 승인 2015.04.01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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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토마토 엄보람 기자의 공주 구도심 투어

시야에서 높은 건물이 사라지니 걷는 내내 자꾸만 옆이 보였다. 소도시를 거닐기에 대도시에 길들여진 빠른 걸음은 적당치 않았다. 대도시에서의 길이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재빨리 지나쳐야 통로에 불과하다. 공주 구도심에서의 길은 머물고 싶은 길이었다. 옛 문화유산들은 그 길 사이에서 풍경으로 그대로 녹아들었다. 일행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충분치 않은 시간이 야속했다. 자박자박, 공주 구도심을 걷는 내내 걸음걸음이 몸의 기억으로 남았다.

▲ 선교사가옥에서 내려가는 길
공주의 근대문화유산에 귀 기울이다

공주는 475년부터 538년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도읍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충청도 일대를 관할하기도 했으며, 이후 1932년까지 충남도청의 소재지로서 충청남도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가 등장하고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행정 및 경제 중심지 역할을 대전에 내어줬다. 이후 충청남도의 중심으로서 공주는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갔다.

지난 3월 12일에 실시된 공주 구도심 투어는 그렇게 어느샌가 잊힌 공주의 기억을 짧게나마 더듬는 여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남의 중심으로서 공주가 남긴 문화유산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그에 담긴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했다. 공주의 문화유산은 도심지역인 금강 이남의 공주 분지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그간 널리 조명되지 않았던 근대 문화유산에 집중하고 이들이 어떻게 현재에 녹아들어 공주 도시재생에 활용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이번 투어의 목적이었다. ‘공주의 구도심에서 미래를 만나다’라는 이름을 붙인 투어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주최하고, 대전문화유산 울림을 따라 걸었다.

▲ 구 공주읍사무소
오후 12시 반, 참가인원이 옛 충남도청 현관 앞에 모여 다함께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금강 위로 봄볕이 눈부시게 부서졌다. 산책을 하기에 더없이 적당한 날씨였다. 한 시간여를 달려 충남역사박물관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시작점이다. 이곳에서 출발해 주변에 흩어져있는 근대문화유산들을 따라 둥그렇게 원을 그리듯 걸어서 돌아오는 코스였다.

구도심 산책에 앞서 충남역사박물관 1층 강의실에 모였다. 장길수 공주향토문화연구회 운영위원의 안내에 따라 과거 사진을 통해 공주의 주요한 역사적 공간의 연대기를 살폈다. 공주의 근대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첫 여정에 모두들 조금은 들떴다.

봉황산 바라다 보이는 길 굽이굽이

구도심 투어에는 충남역사박물관 이상균 연구원과 최병옥 문화관광해설사가 동행했다. 충남역사박물관 뒤쪽 고개를 올라 당도한 곳은 영명 중·고등학교다. 1905년 미국인 선교사 우리암(宇利巖, Williams,F.E.)이 세운 영명학교가 모태다. 현장에서 일행을 마주친 이용환 교감은 “유관순이 이곳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2학년까지 수학하다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라고 자랑스레 전했다.

▲ 제민천변
1930년대 이후 일제의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탄압으로 우리암 교장이 강제 출국당하고, 영명학교는 1942년에 폐교됐다. 그러다 광복 후 1949년 동문들의 노력으로 복교되었으며, 이후 교명을 영명중·고등학교로 바꾸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분리했다. 현재 ‘영명학당’이라고 쓰인 건물을 기준으로 앞의 것이 중학교, 뒤의 것이 고등학교 건물이다. 영명학당 건물 앞에는 우리암 교장의 흉상이 자랑스레 놓여있다.

영명고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뒷산 좁은 길을 조금 오르니 등록문화재 제233호로 지정돼 있는 중학동 구 선교사가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명고등학교의 남쪽 언덕 양지바른 곳에 은밀한 듯, 평화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에 건립된 공주 지역 초기 서양식 건축물로서, 1층에서도 공주의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일 만큼 전망이 좋다.

1919년부터 공주에서 활동하며 충남지역 감리교회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아멘트 선교사의 사택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0년 개인에게 인수된 뒤 한 때 공주사범학교 여자 기숙사로 쓰이기도 했다. 최병옥 문화관광해설사는 “현재는 사유 건물로서 감리교 신자가 살고 있다. 아래층은 살림 공간으로 쓰이고, 윗층은 예배나 손님 접대를 하는 공간으로 이용한다.”라고 귀띔했다.

구 선교사 가옥 아래쪽으로 난 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갔다. 앞쪽으로 공주 시가지가 시원하게 바라보이고, 양 옆으로는 나지막한 정겨운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완만한 언덕길이다. 온 몸으로 봄기운을 느끼기에 알맞춤한 길이었다. 굽이굽이 내려가 봉황산이 마주 보이는 담벼락에 다다랐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쉰 뒤 발걸음을 재촉했다.

▲ 충남역사박물관
자박자박 걷는 제민천길

15분 정도를 걸어 봉황동 공주제일교회에 이르렀다. 최병옥 문화관광해설사로부터 “1903년 영명학교 부근 둔덕 초가집 2채로 시작했었다.”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학교와 병원을 함께 운영하며 공주의 의료복지와 교육에 이바지했다. 지금의 고딕 양식 건축물은 1931년에 지어졌으며, 등록문화재 제472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상당부분 파손되었지만, 보수 시 벽체나 굴뚝 등을 그대로 보존했다고 한다. 공주제일교회 본관 1층에는 과거 공주제일교회의 모습을 담은 역사 자료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공주제일교회 앞길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은 반죽동이 시작되는 경계다. 낮은 건물들이 정겹게 어우러져 있는 반죽동의 널찍한 골목을 자박자박 걸었다. 반죽동당간지주와 김갑순옛집터를 가볍게 둘러본 뒤 제민천을 향해 골목을 빠져나왔다. 제민천을 따라 걷는 길은 구도심 산책 중에서도 마음을 끌었던 코스다.

제민천은 공주 구도심을 남북으로 관통해 금강으로 유입되는 4.2km의 하천인데, 최근 생태하천 복원사업으로 깨끗하게 정비됐다. 정비된 제민천은 양옆으로 죽 늘어서 있는 오래된 건물들과 자연스레 어울렸다. 게 중에는 진흥각, 고가네 칼국수, 중동 오뎅집 등 맛과 이야기가 있는 오래고 소박한 명소들이 제법 있었다.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는 아기자기한 풍경이었다. 일행은 그 중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멋스런 커피집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다음으로 다시 반죽동 골목 안을 걸어 들어가 도착한 곳은 구 공주읍사무소(등록문화재 제433호)이다. 1920년 충남금융조합연합회관으로 처음 준공된 이곳은 공주의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1931년 공주면이 공주읍으로 승격되면서 1985년까지 읍사무소로 이용됐고, 이후 4년간 시청으로 사용됐다. 지금은 ‘공주역사영상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구 공주읍사무소 주변은 1920년대 공주의 중심 시가지로 법원, 경찰서, 우편국 등 공공시설이 지척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건너편에 공주우체국이 자리하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한산한 주택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날 마지막으로 둘러본 근대문화유산은 중동 국고개길에 있는 공주중동성당(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이었다. 출발 장소인 충남역사박물관 바로 건너편에 위치해 있는 공주중동성당 입구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눈앞으로 웅장한 본당 건물이 나타났다. 본당 맞은편으로는 사제관이 자리했다.

공주중동성당은 공주 지역 최초의 천주교 성당으로 1937년 고딕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최병옥 문화관광해설사는 “제가 1960년도에 이곳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 땐 호랭이 신부님이 계셨어요.”라며 이곳에 얽힌 추억을 들려줬다.

다함께 신발을 벗고 고요한 예배당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스테인드글라스가 늦은 오후의 빛을 예배당 안으로 찬란하게 비췄다.

화려한 시절을 잃었다고 하지만, 지금 모습 그대로의 평화로움이 인상적이었던 공주 구도심. 옛 문화유산들은 나지막하고 단정한 건물들 속에서 태연하게 조화를 이뤘다. 구도심 재생사업 일환으로 정비된 제민천은 그런 도심 속에서 쉼터와 같은 역할을 했다.

충남역사박물관 이상균 연구원은 “앞으로 음식점이나 카페 등 구도심 주변을 여행하며 쉬어갈 수 있는 좋은 공간을 발견해 투어와 연계시키겠다.”라며 공주 구도심 투어를 발전시킬 계획을 전하기도 했다.

문화유산의 내력을 샅샅이 알려들지 않아도, 자동차와 높은 건물에 방해받지 않고 도심을 걷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도심은 여행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전혀 다른 속살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걸 새삼 깨달은 투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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