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를 보며

에세이

2006-03-10     편집국

지난 겨울 첫눈이 내리는 것을 보며 반가움과 기쁨이 동심을 자극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법 멋진 풍경이 빈 들녘을 하얗게 채워주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의 기쁨과는 달리 너무 지나친 나머지 한순간에 한계를 넘어 어려움이 되고 말았다. 온통 추위고 폭설의 소식이 계속되었다. 호남지역은 휴교령까지 내려질 만큼 많이 내렸다고 하니 첫눈의 설레임이 두려움으로 변해버리는 순간이었다. ‘조금 모자란 것이 지나친 것 보다 낫다’라는 말은 이런 것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사람과 사람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잘 아는 사이라고 너무 가까이서 자주 마주치다 보면 비 본질적인 요소들 때문에 그 사람의 실체를 놓치기 쉽다. 아무리 친하고 좋은 사이라도 너무 자주 어울려 지내다 보면 서로에 대한 소중함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넘치지 않고 적당하게 그리움과 아쉬움이 받쳐주어야 신선감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가족이든 친구이든 걸핏하면 전화를 걸어 같이 하기를 바란다면 그리움이 고일 틈이 없다. 적당한 선에서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나의 자리를 변하지 않고 지켜가는 모습이야말로 더욱 신뢰감이 가고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차피 인생은 언젠가 홀로 걸어야 하는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도 혼자 태어난 만큼 떠날 때도 혼자 가야 한다. 법정스님이 법문에서 “세월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며 시간 속에 사는 우리가 가고 오고 변하는 것 일뿐”이라며 “세월이 덧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덧없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새삼 가슴을 고동치게 한다. 어떤 대상이든 욕심과 집착은 계절을 지켜갈 수 없는 생명없는 나무와 같다.

내가 좀 베풀고 잘했다고 해서 상대가 그것을 꼭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도움 받고 신세만 지어온 사람이라고 해서 상대를 꼭 은혜롭게 인정해 주지 않는다. 내가 조금 넉넉할 때 베풀다 보면 어렵고 힘들어질 때 누군가 소리없이 찾아와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열매를 주고 꽃을 주고도 아무것도 기댈 것 없이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겨울나무의 모습을 닮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새 봄을 기다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고, 꽃을 피울 수 있는 꿈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가난, 고독, 행복이 수없이 교차되는 과정에서 더 단단한 삶의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행복하다고 해서 그 행복이 영원할 것이라는게 보장될 수 없으며 지금 불행하다고 해서 그 불행이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은 절대 아니지 않는가!

사람이든 풍경이든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 너무 가까이에서 대하다보면 자신의 주관과 부수적인 것들이 앞을 가려 진정한 인품을 볼 수 없 기 때문이다. 삶과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알맞은 거리에서 바라보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 있을테니 말이다.

새 봄에는 우리의 삶 전체가 바뀌길 바라는 것 보단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바뀌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