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맺은 30년 외길 인생, 만든 작품만 3천점 넘어

무심한 돌에 혼 불어넣는 석공예가 도우호 씨

2005-09-03     편집국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외천리 청원IC를 통과하여 청주방향 국도변에 자리 잡은 국도석재(대표 도우호·48). 

여기가 바로 ‘석공예 명장’ 도우호씨가 3명의 석공예가와 함께 작업하는 현장으로서 작업장엔 크고 작은 석불과 석탑들이 불심 가득한 자태로 늘어서 있다. 마당에 들어서니 미리 연락을 받은 이집 주인장이 반긴다.

차갑고 딱딱한 돌을 정과 망치로 쪼아 무심한 돌에 따듯한 숨결을 불어넣고 있는 석공예가 도우호씨. 5년 전 손수 터를 고르고 건물을 세워 마련한 이곳에서 불가와 깊은 인연을 맺는 작업에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돌 조각하는 사람들에겐 작업장으로 쓸 만한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돌먼지에 시끄러운 소리가 싫다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을 피해 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도우호씨가 껄껄대며 말한다.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로 전국기능대회에서 금상 수상
경북 성주군 월항면 수죽리가 고향인 도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해야하는 아픔 속에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1972년 같은 동네에 석공 일을 하시던 고 조중묵(66)선생의 권유로 돌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것이 벌써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면서 감회에 젖는 도씨를 보고 당시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소년으로서 망설일 수 없는 선택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스승과 함께 국회의사당을 건축하는데 참여하면서부터 석공예가로서 처음 발을 딛게 되었으나 불행이도 얼마 못가 스승이 작고함에 따라 도씨는 서울 망우리에 있는 서암석재를 비롯하여 이곳저곳 옮겨 다녀야 하는 형편에 놓이고 말았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도씨는 석재기술을 배우고 익히는데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밤낮으로 돌과 씨름하는 도씨의 모습을 보고 주위에선 “돌에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기도 했다. 이런 도씨가 돌을 다듬는 일에 있어서 만은 남다른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체계적인 교육을 단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그가 단지 현장에서 선배들의 손놀림을 어깨너머로 보고 익혀 스스로 터득한 솜씨로 지난 1988년 경기지방기능경기대회 석공직종에서 2위를 차지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를 계기로 대전의 동산석재로 자리를 옮긴 도씨는 본격적인 석공예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 정진한 결과 1993년 제28회 전국기능대회에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금상을 차지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통석으로 만든 국내 최초 작품 14m의 높이 ‘지장보살’
이제 어느 정도 이 분야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도씨는 1989년 대전의 동산석재에서 석공예기술을 연마할 당시 알게 된 도인사 주지이신 일도스님의 요청에 의해 지난 95년 충남 천안시 광덕면 지장리 소재의 도인사로 들어가 지장보살입상(좌대까지 14m)을 완성하기까지 약 5년이란 세월을 도를 닦는 마음으로 작품을 위해 혼신을 다해 정열을 쏟았다.

이 정도 규모의 작품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조차도 대다수 쪽으로 맞춰 작업을 하여 왔는데 이 작품만은 도씨가 혼신을 다해 통석으로 만든 국내 최초의 작품으로서 후대에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소중히 간직되어 질 것이라는 것이 일도스님의 평이다.

또한 지장보살 주변은 천불상 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 규모는 더욱 섬세하고 웅장하다.

길고긴 수행을 끝마친 도씨는 드디어 지난 1999년 10월 지금의 자리에 자신이 남은 인생 몸 바쳐 창작에 몰두할 작업장(국도석재)을 마련했다.

충청도 지방경기위원회에서도 도씨의 이런 실력을 인정해 지난 1997년 대전기능경기대회에서부터는 심사위원으로 위촉하였으며 지금까지 8년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도씨는 후학들을 위해 지방경기위원회에서 추천한 학생들을 지도하며 지도교사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장인정신으로 걸어 온 외길인생 30년
힘들고 시끄럽고 먼지 날고…, 흔히들 ‘조각의 3D’라고 부르는 게 돌조각이다.

그런데다 수요조차 많지 않아 요즈음은 이 분야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젊은 인재들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중에도 한사코 어렵고 힘든 이 일을 하겠다는 후배들이 있어 한편, 기특하고 대견한 생각도 들지만 그는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의 미래를 책임지기가 버거워 처음에는 후배를 양성하는 일을 망설였다고 한다.

그래도 “굳이 배우겠다는 의지가 있는 후배들은 차마 뿌리칠 수 없어 받아들이다 보니 그동안 거쳐 간 제자들도 제법 많다”면서 “전국기능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한 후배도 몇 명 있는데 그중 김영일(45)씨가 지금 대전지방기능대회심사위원으로 같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 제일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

“사실 국내대회에서도 메달리스트가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한 서너 달은 아무것도 안하고 오직 창작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식솔들이 딸려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장 생계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어 더욱 어렵지요.”

누군가 우리 석조문화를 바로 잡는 일에 정진해야
우리나라 지역은 대체적으로 화강암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 일찍부터 석조문화가 발달했다. 따라서 우리의 선조들은 단단하고 거친 화강암을 마치 떡 주무르듯 매만져 부드럽고 담백한 조형으로 빚어낼 줄 알았던 것 같다.

전국에 천여기가 넘는 석탑과 석굴암 등 많은 석불과 부도 등의 섬세한 조각을 보면 선조들의 빼어난 솜씨를 알 수 있다.

이렇듯 찬란한 석조예술은 통일신라를 정점으로 고려시대까지 명맥을 유지해 오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인해 예술적으로 평가를 받을 만한 석조예술품이 점차 줄어들고 일제시대를 거치며 석공예의 맥은 거의 끊어지다시피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석공예가로서 마지막 명장의 길을 향해 걷고 있는 도씨의 마음은 무거워진다.

“작은 암자는 물론 중요 사찰에도 왜색이 침투해 우리 석조문화를 어지럽히고 있어 이를 바로잡는 일이 시급한데 요즈음은 값싼 중국산 수입품이 활개를 치고 있어 더욱 걱정입니다. 누군가가 우리 석조문화를 바로잡는 일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국도석재를 석조예술의 새 계보의 메카로 삼을 터
한 분야의 명장이 되기 위해 그냥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지금 그의 고민이다. 그래서 그동안 학문연마를 위해 적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본격적으로 우리 석조예술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할 계획이다. 그것은 우리의 석조예술이 불교미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도석재를 대한민국 석조예술의 새로운 계보를 형성하는 메카로 삼으려는 야심 찬 계획도 불태우고 있다.

청년시절부터 돌을 만진 세월이 어느덧 30년.

19세 나이에 시작, 이제 ‘석공예 명장’이 되기 위해 혼신을 다해 정열을 불태우는 도씨는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해 공헌한 공로로 대전광역시장 표창을 비롯하여 대전광역시 충청남도 기능경기위원회 위원장 표창 등 크고 작은 수상경력을 쌓고 있다.

석 조각가는 역사의 기록자요, 문화의 전령사
석 조각가를 우리 역사의 기록자요, 문화의 전령사라고 강조하는 도씨는 각종 기념비'를 비롯해 기념탑, 부도 탑과 중요 사찰의 사리탑, 석등, 석불, 각종 동물상과 조형물 등 지금까지  무려 3000여점이 넘는 작품들을  빚어왔다.

그중 도씨의 대표적인 작품은 충남 보령시 미산면 도화담리 산암사(주지 일도스님)에 모신 좌대 2m에 몸체 높이만 5m가 넘는 거대한 좌불약사여래불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순천시 소재의 도선암에 안치한 마애삼존불, 그리고 경주 수국사에 미륵불상 (4m), 울산에 만불상(4m)  청주공항 내에 있는 정이품송 모형석등을 꼽을 수 있다.

마음을 닦듯 돌을 닦아내는 일로 외길인생을 걸어 온 도씨는 이제 “석물의 대중화와 석공예 부문에서 선조들의 장인정신을 되찾는 일에 더욱 정진하고 싶다”고 말하고 “최근 청주 남석교의 교명주에 있던 고려견상(2쌍중 1쌍은 청주대학교 내 용암사에 옮겨져 부관되고 있음)을 복원하는 작업에 참여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밝혀 귀추가 주목된다.

/ 최원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