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범인 금산군수, “다락원, 하나하나가 스토리”
당시 문화관광과장 맡으며 다락원 탄생 주도 12개 보조사업 총망라한 초대형 프로젝트 독립성, 통합성 함께 추구한 에피소드 밝혀
[충청뉴스 금산 = 조홍기 기자] 올해 20주년을 맞는 금산다락원. 다락원 탄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 현재 금산군 수장을 맡고 있는 박범인 군수다.
당시 금산군청 간부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던 그는 각 부처별로 지원되는 예산을 통합해 지자체 문화중심지를 만드는 실험적 시도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다락원에 대한 인터뷰를 요청하자 박 군수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박 군수를 만나 그 당시로 들어가 봤다.
- 어쩌다가 다락원 기획을 맡게 됐나?
원래는 제 업무가 아니었다. 1998년도였는데 당시 다락원 사업을 담당하는 과장님이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군수님이 겸직을 제안했고 한 달 겸직한 후에 제가 자청해서 문화관광과장(당시 기획정보실장)으로 옮기게 됐다.
- 그렇게 시작된 다락원 기획, 어땠나?
설계부터 준공까지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자리에서 일을 했다. 말 그대로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고 고생은 말도 못 했다. 군정의 모든 역량이 다락원에 결집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12개 중앙부처 사업이 들어간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다락원은 7개 중앙부처 및 산하기관 등 12개 보조사업을 하나로 통합한 건축물로 다부처 공모 연계의 대표 사례다. 12개 사업 보조금이 다 다르기 때문에 독립성과 통합성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
이전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시스템이었다. 실과 간 협력이 이뤄지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중앙부처 승인이 진짜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막판에 스포츠센터를 통합으로 건립하는 것이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수영장 사업비로 20억, 한국마사회에서 체육관 지원사업비로 11억이 있었는데 문체부에서 이것을 따로따로 주라는 지침에 막막했다. 다락원 취지에도 맞지 않았고 따로따로 지을 부지도 없었다. 이것을 통합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통합 승인을 안해주니 2004년 스포츠센터를 뺀 나머지 10개를 가지고 부분 준공을 하게 됐다. 결국 2년 후에 최종 승인을 받았는데 군청이 중앙부처를 상대로 관철해 낸 엄청난 일을 해냈다.
- 통합 승인 에피소드가 궁금하다.
사실 감사원에 집요하게 요청했다. 합리적인 계획인데 승인이 안되고 있다고 끈질기게 찾아갔다. 결국 좋은 판단을 받아냈다. 또 문화부 담당 사무관도 조감도를 가지고 가니 훌륭한 계획이라고 좋은 평가를 해줬다. 여러 이해와 협력을 해준 덕분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후에는 부총리도 다녀가고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올라갔다. 그때서야 금산군이 대단한 일을 했다고 인정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예산지침도 바뀌었다. 앞으로는 금산군처럼 고품격 문화체육센터가 한 지역에 몰아서 하게 해주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 건축학 적으로 보는 다락원은 어떤가?
다락원 건축은 유용성, 예술성, 경제성을 동시에 추구했다. 한 마디로 ‘선 위에 마을’, 그리고 ‘가화만사성’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노인의 집부터 청소년의 집까지 같이 있는 하나의 가정으로 본다.
전기실과 기계실도 건물 별로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 2개로 끝냈다. 설계비도 21억을 절감했고 연간 운영관리비도 5억을 절감시켰다. 예산은 절감하면서 고품격화, 운영의 시너지 효과까지 거두는 모범사례가 됐다.
디자인으로 보면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가 장 미셸 빌모트가 디자인 초기 작업부터 함께했다. 예술성이 뛰어나 지난 2005년 한국건축가협회 한국건축물 베스트7에 선정될 정도로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2010년에는 도시설계학회로부터 문화예술과 복지가 결합된 농촌형 살고싶은 문화도시 모델을 제시한 공로로 특별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마지막으로 다락원을 평가한다면?
다락원은 하나하나가 다 스토리다. 당시 김행기 군수님이 구상했던 이 사업을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낸 감동을 가지고 있다. 최초의 문화복지 클러스터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앞으로도 내실있게 운영해 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