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민호 세종시장, '가을이 오는 서재에서'

2024-09-09     최형순 기자

[충청뉴스 최형순 기자] 아직도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기원전 8년 로마 시인 푸불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Publius Ovidius Naso)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흑해의 오지마을에서쓸쓸히 명을 당했으며, 스스로 추방의 사유를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축사하는

"그것은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자작시 때문이었는데 황제에게는 그것이 두려움을 안겨줄 강력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글은 이집트의 신 토트의 창조물이자, '기억과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처방이라고 했습니다. 이집트는 토트의 창조물 '문자'를 무기이자, 문명이라고도 보았습니다.

모순되게도 문자는 발명된 이래, 비문학적인 지도자들로 인해 무용론에 시달렸습니다. "문학은 사람을 불의로부터 구제하지도, 빈곤에서 해방시키지도, 그저 아무 일도 못하는 감상에 젖게 만들 뿐"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들은 책에 세금을 매기고, 독서는 엘리트주의적 행위라고 비아냥거리며 보란 듯이 문학을 억압했습니다만, 강하게 짓밟을수록 이들의 마음속 두려움은 비례하여 커져갔다는 것이 여러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독서와 문학이야말로 효과적인 저항의 존재이자, 약자를 보호하는 방패였고, 진화의 원동력이었음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통해 증명된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우리 인간은 문명이 태동한 이래 변하지 않았습니다. 크로마뇽인이 돌과 나무를 보면서 전쟁도구를 생각해낸 본능. 그리고 먹을 것과 날마다 겪었던 경험을 동굴 벽에 종려나무 숯을 이용해 그림을 그려 남기려 했던 직립유인원의 욕망은 문명이 지속되는 한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플라톤이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이상사회'를 그토록 갈망하고 설파했건만, 2500여년이 지난 밀레니엄 시대에도 비문학적인 지도자들의 행태는 형태만 바뀌었을 뿐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원시적인 행동과 말초적인 유치 행위를 계속하는 정치지도자들을 보면 토트가 '글'을 무기이자 문명이라 창조한 심오함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문명은 발전했고 인류는 진화했습니다. 크로마뇽인과 우리는 유전학적으로 같지만, 문명적으로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책이 있고 크로마뇽인에게는 없었습니다.

무식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무지함, 불의를 정의로,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하면서 되려 뒤집어 여기는 무식함은 글을 모르는 무지성보다 '기억과 지혜를 보존시키는' 책을 읽지 않는 탓에 기인하는 면이 큽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는 기원전 1세기에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폐허가 된 고대 도서관 입구에서 이런 문구를 읽었습니다.

'영혼의 진료소' 외로움과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책이라 가르치는 그 짧은 어휘. 지식과 본질을 알게 하면서 부끄럽지 않은 인간으로 위엄을 갖추기 위해 할 일은 독서라는 짧은 지시어가 요즘 세상에 사라지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악몽의 '바벨의 도서관' 세계적인 독서가이자 아르헨티나의 국립도서관장인 알베트로 망겔의 사유를 빌리자면 다양하게 조합되고, 건전한 도덕성과 사유를 돕는데 별 쓸모가 없는 도서관이 존재합니다.

바로 많이 읽는데 읽은 것이란 없는 SNS란 책... 결국 무식한지 모르는 무식자가 인용하기만 할 뿐,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도덕적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본질의 착안을 일으키며 유식한 양 목소리를 돋아 힘을 발휘하는 정치, 숫자라는 허구로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백태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주정치의 과잉에 의하여 망한다'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무지한 사람들은 무감각하기만 합니다.

돈키호테마저 “여보게 내 친구 산초. 세상을 바꾸는 것은 유토피아도, 광기의 행동도 아니야, 그건 정의라네”라며 무식하되 충실한 시종에게 타일렀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어리석은 자는 수치스러운 일을 할 때에도 그것이 그의 의무라고 선포한다” 라고 조롱하며 세상의 무식함을 탓한 것은, 태양빛 밝은 이 한세상을 분별없는 어둠 속에서 살기에 너무도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가을입니다. 책을 읽읍시다. 허기지고 궁핍한 이 불쌍한 뇌에 영양가 있는 그 무엇을 먹여 나의 무지함을 구제합시다. 철이 들어버린 이후, 어떤 모양이든 집에는 서재야 있어야 한다고 믿어 왔습니다.

시간이 없어 책을 읽지 못한다 하여도 책을 바라보기라도 하면서 자성과 자습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 쳐도, 가을이 손짓하는 독서의 유혹을 저는 뿌리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 번민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안대희 교수의 “선비답게 산다는 것”을 읽을까, 조우성 변호사의 “리더는 하루에 백번 싸운다”를 읽을까, 이선과 박권이 지은 “AI시대의 신국부론”을 읽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