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장승을 찾아서_용호동장승

쓸려가고 자빠지고 쫓겨나고 꿋꿋이 지킨 세월 300년

2013-02-28     글 사진 송주홍

계족산은 북쪽으로 두 줄기가 나란히 뻗어있다. 두 줄기가 끝나는 지점, 그 줄기 사이에 마을이 있다. 동, 서 양쪽으로 산을 끼고 그 산 아래 형성한 마을이라고 해서 옛날부터 ‘하산디’라 불렀다. 행정명칭으로는 용호동이다.

용호동엔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가로질러 시냇물이 흐른다. 계족산에서 흘러나와 금강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다. 마을 한 가운데,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연결해주는 다리가 있다. 아랫마을에서 이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편에 있는 장승과 탑이 바로 용호동장승이다.

용호동 장승은 할아버지 장승과 할머니 탑으로 구성한다. 할아버지 장승은 화강암으로 높이 105cm이고, 할머니 탑은 잡석 돌무더기로 높이 180cm다. 할아버지 장승은 상부에 얼굴을 새기고 머리에 관모를 쓴 형상이다. 특이한 점은 다른 장승과 달리 가슴께 명문(明文) 대신 합장한 손이 새겨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줄곧 살아온 이택우 할아버지(81)를 만나 용호동장승에 대한 귀한 정보를 얻었다.(참고로 이택우 할아버지는 이장을 20년가량 하고, 15년 전 은퇴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용호동장승은 약 300년 전에 세워졌단다.

“내가 이장할 때 마을에 60호 정도 살았는데, 그때도 정월쯤 병이 돌면 얘들이 네댓씩 죽어나갔어. 그러니 옛날엔 오죽했겄어? 저게 세워진지 300년쯤 됐다는데, 웬 중이 하나 마을에 와서는 장승을 세워야 질병이 퇴치된다고 했다데? 그래서 세웠다는데, 모르지 뭐.” 자료를 찾아보니, 인조 때 벼슬을 지낸 강학년(姜鶴年, 1585∼1647)을 모시기 위해 1697년 이 근방에 용호사(龍湖祠)라는 사우(寺宇,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집)를 세웠다는 기록이 나온다. 용호사는 이후 흥선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이택우 할아버지 증언과 장승이 합장하고 있는 점, 용호사와 장승 연대가 비슷한 점, 기록에 용호사를 사우라고 표현한 점 등을 토대로 보면, ‘용호사에 머물던 중이 마을에 내려와 용호동장승을 세우라고 말했을 것’라는 가설이 모아진다.

아무튼 그렇게 세워진 용호동장승은 지금 자리에 있기까지 여러 번 이사했다. 맨 처음에는 아랫마을에서 다리를 건너 왼편에 있었단다. 그때도 지금처럼 서쪽을 향해 서있었다.

“말도 마. 어마어마했지. 내가 어릴 땐데 해방 직후니까 1946년~7년쯤 되나보네. 장마가 와서 온 동네에 물난리가 났었어. 그때 장승이 같이 떠내려간 겨. 겨우 주워다가 저쪽(지금 위치에서 아랫마을 쪽으로 길 건너 대각선)에 심어놨었어. 그러다가 또 길을 새로 포장한다고 해서 지금 자리로 옮겼지.” 그러면서 이택우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장승이 지금보다 컸었다는 얘기도 했다.

“두 번째 자리에 있을 때에도 물난리가 한 번 났어. 기반이 약해지니까 이놈이 앞으로 고꾸라진 거지. 그래가지고 아랫부분이 부서지는 바람에 지금 자리로 옮기면서 부서진 부분 가리느라고 더 깊게 심었어.”
그나마 할아버지 장승은 처음 모습과 별 차이 없는데, 할머니 탑은 그러지 못했다. 장마에 쓸려가고, 여러 차례 옮기는 과정에서 훼손이 심해 5~6년 전 새로 돌을 가져다가 쌓았다고 한다. 사실 할아버지 장승도 위기는 있었다.

“내가 이장할 때 외지에서 소문 듣고 사람이 많이 왔었어. 좋은 걸로 새로 해다 줄 테니까 이놈은 자기한테 팔라고. 여럿 왔었지. 팔면 뭐해? 안 판다고 매번 거절했지. 마을 가운데 있으니까 여태 남아 있지, 저기 마을 끝에 있으면 벌써 훔쳐가고도 남았어.” 장마 와서 쓸려가고 자빠지고, 길 낸다고 쫓겨나는 모진 풍파에도 300년이나 마을을 지킨 용호동장승. “작년까지는 장승제 지낼 때 가서 술도 따르고 했는데 이젠 그만 할라고……. 늙어서 몸도 시원찮고 다른 사람이 하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