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용 칼럼〕 교만과 편견
[충청뉴스 최형순 기자] 교만(傲慢)’은 성공학에서도 달갑지 않은 단어다. 성공의 적이며, 교만한 자에게는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정의합니다.
19세기 영국의 여류 소설가 제인 오스틴도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교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와 백두산 계곡에 사는 호랑이 중 누가 더 교만할까? 당연히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호랑이는 넓은 세상을 바람처럼 다니면서 이 세상에는 자기보다 더 크고 무서운 것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는 천하에 자기가 제일이라는 확신을 두고 살기 때문에 교만의 극치를 달립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보았다는 황소와 자기의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 배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다가 풍선 터지듯 배가 터져 죽었지요.
한 심리학자가 지적한 일화가 있습니다. 조각가 로랭을 두고 독설가 버나드 쇼는 프랑스 근대 조각의 시조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명성 떨친 예술가는 비난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버나드 쇼는 태연하게 무턱대고 로댕의 작품을 싫어하고 비평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한 장의 데생을 보여 주면서, '최근에 구한 로댕의 작품입니다' 찾아온 평론가들은 그 말을 듣고 다투어 혹평하면서 로댕을 무시했습니다.
쇼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요, 참 이것은 로댕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작품인걸요' 아집과 고집, 주장과 편견은 모두가 억지에서 나오는 외곬입니다.
사자성어에 삼인성호(三人成虎)란 세 사람이 모이면, 없는 범(호랑이)도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다고 함이니, 근거 없는 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우기고 떠들면 곧이듣게 된다는 말입니다.
고집에는 타협이 약이란 말이 있다. 타협은 두 편이 서로 좋도록 양보하여 협의하는 자세이고, 주장·의견·이해가 서로 맞으면 해결되는 것입니다. 고집을 죽이는 것은 져 주는 (항복) 것이다.
항복은 힘이 다하여 상대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자의적인 것도 있지만 타인 적인 것이 있어 충고과 권면에 의한 것도 있습니다. 좋은 것이 좋다는 뜻에서 상대편에게 호의와 아량을 베푸는 경우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억지에서 벗어나는 길은 양보뿐이다. 오히려 어떤 것을 사양하여 남에게 덕을 끼치는 양보가 고집을 꺾을 때도 있는 지혜입니다.
"배 한 척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선장의 눈앞에 갑자기 붉은 불빛이 나타났습니다. 이대로 그 불빛과 충돌할 판이다.
선장은 긴급 메시지로 '항로를 동쪽으로 10도 돌려라.'라고 무선으로 보냈습니다. 상대방이 연락이 왔다. '안 됩니다. 당신이 서쪽으로 트시오.' 화가 난 선장은 '나는 해군 함장 대령이다. 당신이 변경하라'. 몇 초 후에 두 번째 메시지가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이등 수병이지만 바꿀 수 없습니다. 그쪽에서 항로를 변경하십시오.' '이 배는 전함이다. 우리는 항로를 바꿀 수 없다.' 그러자 퉁명스러운 메시지가 돌아왔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여기는 등대입니다.'"
우리는 이따금 이 해군 함장처럼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때가 얼마나 많은가?‘
자만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태도에서 고쳐지고 치유됩니다. 조금만 자존심을 내려놓아라. 그리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더 이상 고집부려서 도움 될 것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고집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용하는 태도에서 고쳐지고 치유될 것입니다. 내 자만과 고집을 잠시 내려놓으면 두 사람 모두 웃게 됩니다.
‘'신곡'의 저자 단테는 "마음을 불사르는 세 가지 불꽃이 있는데 자만심과 질투와 인색함"이라 합니다.
흔히들 자만심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으레 붙어 다닌다고 합니다.
노가의 시조인 노자(老子)는 스스로 업적을 자랑하는 자는 남의 구설수에서 사라지고, 그 재능을 자만하는 자는 그 재능은 만인의 입에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결국 고집은 교만의 앞잡이가 되고, 그 교만은 자멸을 초래하고 악의 보다 무섭다고 멀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