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병장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충북 영동군 심천면 용당리에서 라이연(75) 옹

2006-06-06     편집국

◈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상략) … 고지의 새벽은 상쾌했다. 슈-욱, 슈-욱, 쾅, 쾅. 갑자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포탄이 떨어졌다.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화약냄새. 온세상은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 (하략)

◈ 1950년 6월 26일 월요일

(상략) … 대대장 송일선 소령은 머리에 부상을 입고 붕대를 감은 채 직접 진두지휘중이었다. 그 모습은 나를 비롯해 뭇 장병들에게는 희망을 주었다. 원동력이었다. … (하략)

   
한 노병이 한국전쟁 당시 전장에서 기록한 일기가 공개 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일기의 주인공은 충북 영동군 심천면 용당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라이연(75) 옹.

할아버지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입대 후 1년 남짓 지난 1949년 10월 부터다.

할아버지의 일기에는 이때 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1년만인 1951년 6월까지 600여일의 기록이 생생히 담겨있다.

일기를 쓰게 된 이유에 대해 라 옹은 "살아 돌아가게 되면 훗날 아버지가 또 할아버지가 이렇게 싸웠노라, 이렇게 나라를 지켰노라고 알려주고 싶어서 였다"고 말했다.

라 옹은 "한바탕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나면 사나흘은 여유가 생겼다"며 "그때마다 펜을 꺼내들었고, 급히 이동을 할때면 작은 메모지에 간략하게 나마 지명과 시각, 지휘관의 명령 등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일기는 할아버지가 복무했던 제17연대와 1사단의 이동경로를 따라 밀고밀리는 전장의 상황을 그대로 담고 있다.

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포격으로 불바다가 된 옹진반도, 라 옹 자신도 온몸에 파편상을 입었던 치열한 포항 - 안강전투, 9.28 서울수복과 중공군의 참전.

라 옹의 일기는 하나의 작은 전쟁사(戰爭史)다.

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어 피를 흘리다 고통에 못이겨 수류탄을 터뜨리고 자폭한 전우의 모습, 전우의 시신을 버려둔 채 후퇴해야 했던 상황 등 스무살 청년이 전장 한 가운데서 바라본 전쟁의 참혹함이 솔직히 묘사돼 있다.

그로인해 청년이 겪어야 했던 심경의 변화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라 옹은 "죽어가는 전우들을 그대로 두고 발길을 옮겨야 했던 일이 지금도 한이 된다"며 "가끔 일기를 들춰보고 전우들 생각에 울고 웃는다"고 말했다.

당시 일기를 적어놓은 종이는 낡고 삭아 20년전 라 할아버지는 일기를 원고지에 다시 옮겨 적어 보관해왔다.

일기는 그저 할아버지의 책장 한 구석만 그렇게 지키고 있었을 뿐, 젊은세대에게 한국전쟁이 잊혀져가는 것 처럼 할아버지의 일기도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알고 지내는 또 다른 참전용사에 의해 일기의 존재가 이제서 알려진 것.

국가보훈처는 할아버지의 기록이 빛을 볼 수 있도록 국방홍보원이 발행하는 '국방일보'에 연재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총성이 멎은지 반세기.

라 옹은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전우들의 숭고한 뜻이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뇌리에서 희미해져 가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라 옹의 기록이 활자화 돼 전쟁의 참혹함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그의 50여년전 바람이 부디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청주CBS 김종현 기자 kim1124@c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