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IBS, 암이 정상 ‘혈관 발달 설계도’ 훔쳐 쓰는 원리 규명
[충청뉴스 이성현 기자] 기존 항암 치료의 큰 축이었던 ‘항혈관신생 치료’의 한계를 뛰어넘을 혁신적인 암 제어 전략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제시됐다.
암세포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는 신생 혈관이 사실은 암이 독자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정상적인 혈관을 만들 때 쓰던 '설계도'를 그대로 훔쳐 와 사용한 결과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생명과학과 정인경 교수, 의과학대학원 이지민 교수가 기초과학연구원(IBS) 혈관 연구단 고규영 교수와 공동 연구를 통해 종양이 정상 혈관 발달 과정에서 일시적으로만 쓰이는 유전자 프로그램을 도용해 혈관신생을 유도한다는 원리를 규명했다고 29일 밝혔다.
암세포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전이하기 위해 주변에 새로운 혈관을 만들어 낸다. 이를 차단하는 혈관신생 억제제가 임상에서 널리 쓰여왔지만 장기 치료 시 암세포가 주변 환경에 맞춰 성질을 바꾸는 ‘가소성(plasticity)’ 때문에 내성이 생겨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고질적인 한계가 있었다.
공동 연구팀은 이러한 변화가 후성유전체 수준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연구에 착수했다.
8종의 고형암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암의 종류와 상관없이 종양 혈관 세포에서 특정 유전자 프로그램이 공통으로 활성화돼 있으며 이것이 환자의 나쁜 예후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연구팀은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활용해 세포가 정상적인 혈관 내피세포로 분화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재현했다.
특히 정밀한 단일세포 후성유전체 및 3차원 게놈 분석을 적용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종양 혈관에서 활발하게 작동하던 유전자 조절 회로가 정상 혈관이 완성되기 직전 단계인 ‘후기 전구체 단계’에서만 잠시 나타나는 프로그램과 정확히 일치했던 것이다.
이는 암세포가 혈관을 만들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메커니즘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배아기 시절 우리 몸이 쓰다가 서랍 속에 넣어둔 ‘과거의 설계도’를 다시 꺼내 도용한 것임을 의미한다.
연구팀은 종양미세환경을 정밀 추적한 끝에 이 훔친 설계도를 다시 활성화하는 핵심 분자 고리가 ‘인테그린(Integrin) 수용체’라는 점을 밝혀냈다.
실제로 유독 예후가 좋지 않은 대장암(CMS4 아형) 환자의 종양 혈관에서 인테그린의 발현이 유의미하게 증가해 있었다.
연구팀이 이를 검증하기 위해 사람의 대장암 조직을 이식한 실험용 생쥐에 인테그린 억제 물질을 투여하자 종양 내 신생 혈관 형성이 유의미하게 억제됐으며 종양의 크기 자체도 눈에 띄게 감소하는 치료 효과를 입증했다.
정인경 교수는 "이번 연구는 분화 기전 자체가 명확히 정의되지 않아 임상적 의미를 연결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암이 새로운 메커니즘을 창조한 게 아니라 정상 발달 프로그램을 훔쳐 쓴다는 본질을 규명한 만큼 기존 치료제의 내성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종양 혈관을 다시 정상 혈관으로 되돌리는 신약 개발의 문을 열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