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암행어사 박문수를 만나러 가는 길
개인의 선택과 행보가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 생각하는 삶 중요
[충청뉴스 유규상 기자] 8월 15일 제81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기념관에서 취재를 마치고 다음 취재지인 아산 둔포로 이동하던중 박문수의 묘소길 안내 표지판을 우연하게 발견하고 예정에도 없이 그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박문수하면 암행어사로 유명하고 연고지가 천안사람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던 터라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한번 탐방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
큰 도로를 따라 천안시 북면의 비포장 도로를 거치고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은석골 고령박씨 재실이었다. 문중사람들이 제향을 모시기 위하여 만든 재실 주차장과 박문수의 동상을 둘러 보고 재실을 살펴보았다. 문잠긴 재실의 내부구조를 다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재실의 구조는 알수 있었기에 주변을 모두 돌며 풀이 무성하게 자란 담장을 헤집고 들어갔다. 혹시 뱀이라도 나올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어서 큰 막대기로 풀숲을 더듬더듬 밟아 나갔다. 그리고 재실 사방 모두를 다른 각도에서 휴대폰 사진기로 열심히 눌러 풍광을 담았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최종 목적지인 묘소를 찾는 일은 다음 단계였다. 하지만 이정표에 표기된 2.2km를 보면 걸어서 갈 일은 아니어서 차를 몰고 접근 가능한 도로까지 이동했다. 마을 안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5분정도 이동하니 전원주택을 여러번 돌고돌아 도로가 끊어진 마을 끝에서 일단 차를 세우고 산길로 걸어 들어갔다.
좁은 산길은 이미 길은 있으되 간간히 통나무를 횡으로 대어 돌이 구르는 것을 막은 험준한 길이기에 조심스럽게 오르다보니 20미더 전방에 부부로 보이는 등산객이 앞서 걸어 가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따라잡고 박문수의 묘소까지 얼마나 가야 하는지를 물어 보기 위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 등산객들도 나름의 속도가 있어서 한참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박문수 묘소까지 얼마나 가야 합니까 ?” 물었더니, “지금 걷는 속도를 감안하면 40분 정도는 더 가야 합니다” 하고 답변했다. “그럼 지름길은 있습니까 ?” 재차 물었다. “그런 곳은 없습니다” 하면서 “단지,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은 여기 아래로 가면 됩니다”라고만 알려 주었다.
길을 묻고 경로를 알고자 하는 것은 현재 점심을 하지 않고 산을 올랐기 때문에 하산하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름하기 위함이었지만 늘 산을 오르면서 잊고 있던 생각은 산을 너무 깔보고 준비없이 대들면 언제나 낭패를 본다는 사실을 지금 다시 경험하고 있다.
박문수의 묘소를 만나려고 오면서 궁금증은 두가지 였다. 하나는 이 정도의 인물이면 묘소까지는 산길을 타지 않고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큰 도로가 개설 되는 것이 상례이나 도로를 발견하지 못했고, 묘을 썼을 당시에 이렇게 산 중턱까지 상여로 운구할 수 할 수 있었는지를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그 궁금증은 하산하면서 내려오는 등산객에게 질문을 던졌다. “묘지에 오르는 반대방향에 도로가 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당시에도 산소를 써도 될 높이가 아닐까요 ?” 하면서 “ 한 20분을 더 가면 은석사가 나오고 거기를 거쳐 얼마 더 가면 박문수 묘소가 있습니다” 라고 알려 주었다.
터벅터벅 혁혁대며 걷다보니 어느덧 은석사 절에 도착했다. 절은 사찰이름을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이정표를 통해서 알 수 있었고 절 끝자락에 있는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고 근처 산신각에서 들러 사진도 찍었다. 흔히 들은 바로는 절의 후면에 토속신앙인 산신각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우선순위에서는 밀렸지만 불교와의 타협의 산물로 절 뒤에 산신각이 자리잡게 되었다는 정도의 지식을 알고 있었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산신각 안에 들어가 그림을 카메라에 남겼다.
산신각을 나와서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조금 더 오르니 나무로 만든 계단이 앞에 나타났다. 계단을 순서대로 밟아 오르는 길이라 힘들기도 하였다. 길에 오르는 동안 언제부터인지 날파리들이 내 마리 주변을 맴돌며 윙윙대며 달려들어 손으로 휘졌고 쫒아도 계속 떨어지지 않아 내내 불편스러웠다. 마치 밭에서 뽑아도 뽑아도 다시 나는 잡초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이 새삼 경이로울 뿐이었다.
힘들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나무계단을 최종적으로 오르니 드디어 좌측 평지에 어사 박문수 묘지가 보였다. 그리 대단하게 조성된 묘지는 아니었지만 위치를 보니 그래도 명당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묘지에서 사방으로 사진을 촬영한 다음에 2가지 긍금증이 다시 생겼다. 하나는 박문수는 문인인데 무인들을 상징하는 비석이 묘지양쪽에 있는지와 행장을 보니 암행어사를 6개월 밖에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민중들의 삶 속에 암행어사로서 강렬하게 자리잡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묘지 답사후 역사 전문가인 교수님께 전화를 걸어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했더니 통화가 잘 안 되어 중단하고 다음에 물어 보기로 하였다.
이제 2시가 넘었다. 잠시 들렀다가 간다는 계획은 이제 허사가 되었고 오후 일정은 모두 산길에서 소비한 셈이다. 그래도 역사적 위인을 만나러 산에 오르는 시간은 소중한 것이기에 산길의 방향, 이동경로는 사진을 중간중간 촬영하여 흔적을 남기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선인을 만나려고 묘지를 답사하는 이 길을 언제 다시 올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산행길에도 최선을 다해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꼼꼼하게 수첩에 메모를 했다.
박문수에 관한 흔적은 조선왕조신록이나 역사책을 통해서 알수 있지만 등산길에서 설치된 홍보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홍보물에서는 원수같은 상대방의 죄를 객관적으로 볼수 있었던 넗은 아량, 임금 영조에서 머리를 들어 직언했던 충성심, 백성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해결하려 했던 일들은 후대에서도 높이 평가 되는 부분이고, 이것이 짧은 암행어사 기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는 대변자가 된 비결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오늘 늘 세상을 살려서 크던 작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개인의 삶은 각자 소망하는 바에 따라 뜻을 세우고,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좀더 크게 지역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로 범위를 확대하면 그 선택과 행보가 후대에서 냉엄한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 "세상을 생각없이 살지 말자" 는 다짐의 하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