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는 만드는 것보다 유지가 더 어려워”

음악인생Ⅳ-동구합창단 이끌며 얻은 교훈

2006-09-07     편집국

1995년 여름, 가깝게 지내는 형님이자 스승께 연락이 왔다. 동구에서 어머니합창단을 만드는데 지휘를 맡아보겠냐는 제안이었다. 당시 동구합창단을 만들기 위해 발 벗고 나선 동구주민이자 부녀회 일을 맡고 계신 분이 형님께 추천을 의뢰한 것이다. 동구는 나의 고향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줄 곳 동구에서 자랐고 지금도 부모님은 동구에 사신다.

   
▲ 김 상 균 대전문화예술의전당 홍보마케팅팀 daejeonart@hanmail.net
비록 주소지는 서구지만 지금도 동구 주민이라고 함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토박이였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가뜩이나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고 문화적으로 소외되던 내 고향 동구에 합창단이라니… 흔쾌히 수락했다.

그 때까지 대전 다섯개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유일하게 동구만 합창단을 운영한 적이 없었다. 대덕구와 동구 모두 합창단이 없었지만 대덕은 운영되다 일시적으로 해체되었던 시기였다.(2006년 6월까지 5개 구청 합창단이 존재했으나 현재는 중구만 일시적으로 해체상태) 그러니 유독 동구만 합창단 명함을 내밀어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구 주민으로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고 더군다나 지휘를 맡으라 하니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도 가야한다는 공명심이 생겼다. 한편으로는 해외 활동 프로필이 있는 것도 아니고 10여년 시립합창단원 경력과 교회 성가대 지휘 경력밖에 없었던 나에게는 영광이기도 했다.

하나의 연주단체를 만들고 유지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나 관에서 일정부분을 지원해주는 경우는 그래도 짐을 많이 던다. 단원들에게는 취미생활과 자기계발 기회를 제공하고 주민들에게는 삶의 질 향상과 봉사, 문화적 소양을 넓히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기초자치단체의 행사에 참여해 연주하고 대외적인 활동으로 소속자치단체의 홍보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이런 연주단체의 역할이기 때문에 관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다른 민간단체들보다는 수월하게 동구여성합창단의 창단기틀이 마련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순조로울 수는 없었다. 구청 담당부서에서 단원모집 홍보를 하고난 후, 인동에 있는 한 예식장에서 첫모임을 가졌다. 첫모임이라 상견례만 가지려했지만 담당자의 권유로 다함께 부를 수 있는 곡을 선택하여 악보를 준비해 갔다. 처음에는 무려 100명이 넘는 인원이 모인 것으로 보아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이 들떴다.
그 마음이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창단연주일정을 포함한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를 밝히며 상견례를 하고 준비해온 악보를 나누어준 뒤 멜로디만으로 다함께 노래 부르기를 유도했다. 준비한 곡은 누구나 학창시절에 불러보았음직한 김동환 시, 김규환 곡 ‘남촌’이었다. 피아노 전주가 흐르고 동구문화역사의 한 획을 긋는 첫 번째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고 생각했던 노래가 전혀 다르게 불려지고 있었다.

가곡 ‘남촌’은 악보와 상관없이 당시 가요무대에서 가끔씩 나오던 ‘산넘어 남촌에는’으로 불려진 것. 선창을 하니 한바탕 웃음 뒤에 원래의 곡으로 돌아온다. 그날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막막함을 느끼며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이 이야기는 동구합창단 역사에 잊혀지지 않을 에피소드로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재미있다고 하기보다 창피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40대 중후반을 넘어선 어머니들이 대부분이었고 악보를 콩나물대가리로밖에 볼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전업주부들이 돌파구를 찾고자 나선 자리라하면 창피보다는 격려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어찌되었거나 동구합창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노래를 좋아하지만 악보를 전혀 읽지 못했던 주부들도 있었고 그동안 이런저런 아마추어 합창단에서 취미생활을 했던 경력 있는 주부들도 있었다. 처음엔 100명이 넘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모이면서 의사 없이 나왔던 사람들이 정리되고 40명 내외의 정예멤버로 추려지면서 본격적인 창단연주를 준비하게 되었다.

프로그램도 쉽게 부를 수 있는 곡들로 선정해야했고 연습하는 방법도 기초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주부들의 의지를 눈빛에서 보았다. 노래하며 즐기는 모습도 보았다. 음악 하는 선배들로부터 귀동냥으로 들었던 것이 있었다. ‘아마추어 합창단을 맡게 되면 음악적인 욕심을 내지 말라.’ 나는 동구합창단을 지휘하면서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되었다. 하나의 단체를 이끌고 가는데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지휘자를 비롯한 대표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끌고 가야하는 지 말이다. 욕심 내지 말라는 것이 단순히 음악적인 것에서만이 아니라 자리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일찍 깨닫게 되었고 의견이 분열되지 않도록 중심을 지킴으로써 단원들과 인간적인 신뢰감을 쌓아야 한다는 것도 느꼈다. 창단부터 만 4년을 지휘하면서 단원들한테 강조해오던 것이 있었다. “우리는 즐기기 위해 노래를 하는 것이고 우리가 즐거워야 우리로 하여금 남들이 즐거울 수 있습니다”, “나는 나의 음악적인 한계를 압니다. 훗날 여러분의 실력이 향상 되서 나보다 더 뛰어난 지휘자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는 나 스스로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여러분 가르칠 실력은 되니 음악적인 신뢰감을 갖고 따라와 주세요.”

결국 4년 뒤, 한계를 느꼈던 나는 스스로 지휘봉을 놓았다. 그동안 후회 없이 성심을 다했다고 자부했고 단을 이끌었던 단장님과 임원들, 그리고 믿고 따라줬던 단원들에게 감사했다. 비록 자신들보다 나이어린 지휘자였지만 선생으로서의 대우와 신뢰를 보내줬던 이들이기 때문에 지금도 마주치면 살갑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무대 위 연주자가 아니라 무대 뒤 기획일을 하고 있는 지금도 돌이켜보면 정말 감사하고 뿌듯하다. 연주자로서 지휘자로서의 경험과 새로운 단체를 창단하는 시점에서 관여를 했던 경험들이 지금의 내가 있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2년, 기획사를 운영하면서 다트(D’art)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대전에 시립교향악단 외에 새로운 오케스트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년간 가지고 있었지만 풀어야 할 숙제들이 너무 많아 망설이고 있던 차에 호흡을 맞출 수 있는 후배와 의기투합하여 순수한 민간오케스트라로 창단했다. 대전문화예술의전당 개관준비팀으로 들어올 때까지 단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물론 그때도 내가 우선이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위해 헌신했다고 자부한다. 하나의 단체를 만드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동안 창단했던 두개의 단체를 포함해 활동하고 있는 모든 단체들이 순수함을 잃지 말고 초심을 지켜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나보다도 단체를 먼저 생각하며 욕심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을 가지면 분명히 발전할 것으로 본다. 세상은 겸손한척 하는 사람과 진심으로 겸손한 사람을 구분할줄 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