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홍규 변호사 법률이야기

구 술 변 론

2007-01-23     양홍규

과거 법원은 각 재판부에 배당된 사건 중 관리 가능한 일정 수의 사건을 접수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변론기일을 정하고, 이후 일정한 주기로 속행을 하면서 심리를 진행하는 형태로 사건관리를 하여 왔다.

이러한 방식은 한정된 시간에 많은 사건을 심리할 수 있고, 소송운영이 정형화되어 있으며, 소송 진행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등 나름의 장점이 있었으나, 다음에서 살펴보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만들어 내면서 결국 사법불신의 문제를 야기하여 왔다.

   
▲ 양홍규 변호사

첫째, 과중한 사건부담으로 인하여 재판장의 사건장악력은 대단히 약화되어 있고, 무의미한 기일진행이나 기일공전이 빈발하고 있었다.

둘째, 법정이 단순히 준비서면의 교환을 위한 장소 내지 다음 기일을 고지받는 지극히 형식적인 절차진행 장소로 변모되어 있었다.

셋째, 증인신청서의 미제출, 증인신청 절차의 지연, 증인 불출석 등으로 기일이 공전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고, 주신문은 유도신문과 형식적 답변이 지배하는 반면 반대신문은 시간적 제약으로 인하여 충분한 탄핵기회가 차단되는 등 효율성이 크게 떨어져 있었다.

넷째, 전체적인 법관 업무부담의 불균형과 인력 배분의 왜곡현상이 초래되고, 사건부담이 많은 법원에서는 미제증가의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사건처리를 서두를 수밖에 없어서 결국 심리의 충실도가 저하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

다섯째, 각 법원에서는 일반적으로 접수순서에 따라 제1회 변론기일을 지정하고 있으나, 접수 시부터 제1회 변론기일까지의 기간이 법원별로 상당한 편차를 보이고 있고, 그 기간 동안은 아무런 절차진행 없이 단순 대기 상태로 묶여 있기 때문에 조기에 종결될 수 있는 사건도 불필요하게 오래도록 기다려야 하는 불합리가 발생하고 있었다.

여섯째, 소송의 궁극적 주체인 당사자가 재판과정에서 너무 소외되어 있고, 거기에서 생기는 불만이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팽배해 있어, 그 결과 패소한 당사자가 쉽사리 승복하지 못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법작용 전반에 불신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개정된 민사소송법은 민사사건 심리방식을 전면적으로 재편하여, 서면에 의한 쟁점정리절차를 선행하도록 하고, 준비절차기일에 모든 쟁점을 정리하도록 하고, 변론기일에 집중증거조사를 완료하도록 하고, 소송의 궁극적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소송당사자에게 절차진행과정에 적극 참여하고 법관 면전에서 직접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보장하는 등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개정 민사소송법이 당사자의 절차참여, 구술주의의 원칙을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중한 재판부담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원으로서는 당사자들에게 구술변론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채 서면교환을 통한 재판을 해온 것이 재판의 실상이었다.

변론능력이 없는 당사자들이 법정에서 중언부언하면서 시간을 소비하려하면 법원은 단호하게(?) 이를 중단시키면서 법률전문가에게 물어보고 재판에 임하도록 권고 내지 충언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로 인해 당사자들은 법정에서 충분히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고, “무슨 말을 못하게 한다”면서 법원을 원망하고 돌아서고, 소송에 패소하기라도 하면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일쑤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 이후 ‘설득은 법정에서’, ‘판결은 간이하게’,‘원칙이 살아있는 공판’을 슬로건으로 하고, 구술심리를 철저히 관철하여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법원이 될 것은 전국 법원이 주문하였다.

또한 ‘결과가 보편타당하다고 하여 그것만으로 훌륭한 재판이 될 수 없고 사람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한 그것은 죽은 판결이다’, ‘적정한 결론을 내리는 과정이 중요하다’라고 선언한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민사소송의 이상인 직접주의, 구술주의를 통해 법원의 신뢰를 높여가지는 것이다.

법원이 구술주의 관철을 선언한 이후 법정의 모습은 사뭇 달라진 느낌이다. 당사자들이 자신의 주장과 항변을 길게 늘어놓아도, 쟁점이 아닌 필요 없는 말을 하여도, 법원은 전보다 관대하게 시간을 허락한다.

그러나, 혹자는 이런 우려도 한다. 법정이 거짓말쟁이들의 공연장이 될 우려가 있다고. 진실로 억울한 사람이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때, 소송기술을 터득한 거짓말쟁이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여 승소할 수도 있다.

이것은 변론주의의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며, 따라서 아무리 변론진행을 구술주의로 관철한다고 하여도 당사자는 서면에 의한 주장, 항변 등을 잘 정리하여 제출하고, 증거수집 및 제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변호사  양 홍 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