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삼의 역사 문화적 가치 재조명

최초로 인삼을 수출한 나라는 고구려

2007-09-16     김거수 기자

1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충청남도 주최로 열린 ‘고려인삼의 역사 문화적 가치 재조명을 위한 국제학술 심포지엄’에 발제자로 나선 웨이쯔강 박사(중국 중산대)는 "역사적으로 고려인삼 원산지가 중국의 요동(遼東)"이라고 주장하고 나서 충격과 함께 우려가 제기됐다.

우리 학계에서는 이러한 주장은 동북공정과 관련된 중국학계의 보편적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중국의 웨이쯔강 교수와 한국의 이철성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토론에는 이헌창 교수(고려대 경제학과), 윤재운 박사(동북아역사재단), 정성일 교수(광주여대)와 일본의 나가모리 미츠노부 교수(천리대) 등 4 명의 학자들이 참여했다.

첫 발제자인 중국의 웨이 박사는 “중국역사 문헌에 따르면 고려인삼의 재배와 응용 역사는 1700여 년에 이른다. 중국역사 전적에서 ‘요삼(遼參)’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그 원인은 고려인삼의 산지가 ‘遼東’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고려인삼은 BC 37년 중국의 요동과 한반도에 강대한 고구려 국가가 형성되었는데 고대 ‘遼參’의 산지가 고구려의 소유로 되면서 ‘遼參’은 고구려의 중요한 경제적 物資로 부상했다”고 말했다.

웨이 박사는 이어 “고구려가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된 후 고구려의 유민들은 대량 남하하여 한반도로 갔는데 그때 고구려성에서 인삼을 한반도로 가져가서 재배하기 시작했다. 중국 역사책에서는 BC 37년에 건립된 고구려와 서기 918년 왕건이 건립한 고려 왕조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고구려 경내가 원산지인 인삼을 ‘고려삼’ 혹은 ‘신라삼’으로 기재 했으며, 또 ‘遼參’으로 부르기도 했다”며 “중국 南朝 梁 때의 道学家인 陶弘景이 483년 《神农本草经集注》이란 책에서 ‘고려 즉 요동’이라고 썼다”고 주장했다.   

웨이 박사는 중국의 중산대학 국제관계학 부교수겸 한국연구소 부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한국역사 문제 전문가이다.

이에 대해 또 다른 발제자인 이철성 교수(건양대)는 “고려인삼은 인간의 모습을 닮은 ‘유체인삼(有體人蔘)’으로 요동인삼과는 구별되어 왔다”라며 "우리 학계에서는 웨이쯔강 박사의 주장을 이해 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책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도홍경(陶弘景)의 ‘명의별록(名醫別錄)’ 등 몇몇 중국 자료에서 ‘고려(高麗)는 요동(遼東)’이라는 기록이 보인다고 하여 고려인삼과 요동인삼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한다”라며 “요동인삼은 요삼(遼蔘) 혹은 요동삼(遼東蔘)으로도 불린다. 일본의 이마무라[今村革丙] 가 쓴 ‘인삼사’ 제7권 ‘본초강목계몽(本草綱目啓蒙)’에 인삼 종류와 품질에는 종류가 많은데, 조선・중국・일본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조선의 것이 제일의 명품”이라고 적혀있다고 말했다. 또 “ ‘집해’에서는 요동삼, 요삼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조선과 요동을 혼동(混同)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라며 위 교수의 주장을 일축했다.

이어서 이 교수는 중국과 일본에서 고려인삼에 대한 선호도 매우 높았다고 하면서 몇가지 사례를 소개하였다. 19세기 중반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던 기간에 아편해독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던 고려인삼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여 수출량이 최고조에 달하였으며 1898년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인삼과 미국삼의 대중국 수출을 비교하면서 고려삼은 미국삼보다 7배의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2배 이상 많은 양이 선적되었고 또한 성호사설을 지은 이익이 “일본인의 풍속에 병이 생기면 반드시 인삼을 쓰니 만약 조선인삼 무역을 막으면 죽을 각오로 다투어 사단이 일어날 것이니 어쩔 수 없이 교역을 허락하였다고” 말했다면서 고려인삼에 대한 일본사회의 열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토론자들은 중국측의 고려인삼의 원산지 주장을 가장 뜨겁게 떠올리며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반박해 나갔다. 

 나가모리 교수는 “일본에서 인삼에 관한 기존연구를 살펴볼 때 이마무라 도모(今村枉)의 업적을 무시할 수 없다. 이마무라는 1940년에 인삼사의 방대한 자료를 수집, 분석한 성과를 ‘인삼사(人蔘史)’전7권으로 펴냈는데, 이 책이 인삼에 관한 역사문화적인 학술적 연구의 효시로 이 책을 넘는 연구는 아직 일본엔 없다”면서 “이 가운데 제 6 권‘人蔘雜記篇’ ‘日本의 人蔘傳說’에는 모두7개 이야기(약12쪽)가 소개되었는데 이 가운데 3 개가 학이 조선에서 인삼을 물어 가져오는 이야기”라고 밝히며 이와 같이 일본에서는 전설에서도 고려인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어로 말하는 '인삼'은 일본에서는 '조선인삼' 또는 '고려인삼'이라고 호칭되는데 일본 이름(和名)인 '오타네닌진(御種人参)'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충격을 받은 제8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의 주도로 조선 의학 연구가 진행되면서 '조선인삼의 국산화'는 일대 국가 프로젝트가 되었다. 머지않아 이 계획은 결실했고 1738년에는 에도(江戶) 니혼바시(日本橋)에서 인삼종자(오타네)를 판매, 1763년에는 간다(神田)에 인삼좌가 개설되면서 일본은 국산인삼(오타네 닌진)의 대량생산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고 밝혔다.

나가모리 교수는 “원래 일본에서는 자생(自生)하지 않았던 인삼이 일본 문헌 중에 나타나는 첫 기록은 739년(聖武天皇天平11年) 7월 발해 문왕(文王)의 사신 기진몽(己珍蒙)이 인삼 30근(斤)을 공헌(貢獻)한 것(『續日本紀』)”이라고 말했다.

나가모리 교수는 또 일본에서 1670년대 이후 인삼의 수요가 상류계급으로부터 일반민중으로 확대되며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인삼좌 앞에는 비싼 인삼을 구하려 온 사람들이 줄을 지었고 실업한 무사(浪人)들이 수수료(手間賃)를 받아 전날밤부터 대기했고, 인삼좌는 하루 판매량을 다 팔면 문을 닫았은 이야기, 그래서 인삼을 사지 못한 사람들이 '고용주에게 면목이 없다. 절복(切腹)해서 사과한다' 등 외치며 자살 소동을 일으켰고, 부모의 병을 치료하려고 효녀(孝行娘)가 자기 몸을 판다는 이야기도 드물지 않았다는 이야기 등을 예로 들었고 1710년에는 인삼붐에 들끓던 일본에서의 수요를 채우기 위하여 대조선(인삼)무역을 목적으로 특별한 은화인 人蔘代往古銀을 주조하기 까지 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일본에서 '인삼'은 주로 한국에서 수입되는 고급약재, 또는 인삼주, 인삼차로부터 인삼초콜릿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가공된 한국의 특산물로 높은 지명도를 자랑하고 있다. 인삼에 포함되는 약효 성분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진행되는 동시에 인터넷상에서는 취미로 인삼을 재배하는 일본사람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인삼이 국경을 넘은 인류의 재산임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며 일본인들의 한결같은 인삼사랑을 강조했다.

윤재운 박사는 "중국측이 공식적으로, 학술적으로 고려인삼의 원조가 자신들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상당히 당황스럽다"면서 ‘遼參’이란 용어 문제에 대해 “중국학계에서는 고려인삼을 ‘遼參’이라고 일반적으로 칭한다고 한다. 하지만 발표자도 지적했듯이 중국에 최초로 인삼을 수출한 나라는 고구려이고, 고구려멸망 이후 남북국시대의 신라나 발해도 중국뿐만이 아니라 일본, 서역 등에 인삼을 수출한 것으로 보았을 때, ‘遼參’이란 용어는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면서 “왕건이 세운 고려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점에서 국호를 정했고, 현재의 한국의 영문국호인 ‘Korea’도 ‘고구려=고려’에서 연유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더더욱 그러하다”고 강조했다.

  윤 박사는 史料 인용과 해석에도 문제가 있다며 “위 박사는 발표문에 梁나라 陶弘景이 483년 ꡔ神農本草經集注ꡕ라는 책에서 “‘고려 즉 요동이다’ 또 ‘백제삼은 외형은 가늘지만 단단하고 희며 맛은 상당(삼)보다 옅다. 다음이 고려(삼)이다.’”라고 썼다고만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명나라 李時珍이 편찬한 ꡔ本草綱目ꡕ에는 도홍경의 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宏景曰】…俗內重百濟者 形細而堅白 氣味薄於上黨者 次用高麗者 高麗卽是遼東 形大而虛軟不及百濟者
  ‘굉경(도홍경)이 말하기를’ … 백제삼은 형태는 가늘지만 단단하고 희며 맛은 상당삼보다 옅다. 다음으로 고려삼이다. 고려는 즉 요동이다. 크지만 연하여 백제삼에 못 미친다.

  이에 따르면 중국 요동에서 나오는 고려삼은 한반도에서 나는 백제삼과 다르고, 품질면에서도 백제삼이 요동삼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次用高麗者…’ 뒷 부분을 왜 인용에서 뺏는지 의문이 든다”라며 해명을 요구하였다.

  윤 박사는 이와 함께 “인삼이 삼국시대부터 중국 일본과의 무역거래 품목으로 떠올랐고, 남북국 시대엔 이들 두 나라와 함께 이슬람 문화권의 국가들에게까지 거래가 이루어 졌음을 확인했다”며 “아랍 지리학자인 이븐 쿠르다지바(Iban Khurdadhibah)는 자신의 저서 ꡔ諸道路 및 諸王國志ꡕ에서 신라가 수출하는 상품명 가운데 고라이브가 있는데 이것을 인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고 밝혔다.
  정성일 교수는 “인삼무역의 또 하나의 전기를 말한다면 바로 지금이 아닌가 생각된다.”라며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 인삼은 해외 수출의 역사만 하더라도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천 년이 훨씬 넘는데 현재 국제 인삼 시장인 홍콩 시장 점유율이 1990년 24.4%에서 2002년에는 9.6%로 떨어지는 등 크게 위축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인삼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하여는 “영세한 생산자와 소상인들이 현대적 생산․유통 체제를 갖추어 가도록 정부의 적극 지원, 전자식별 확인(RFID) 사업을 통한 생산 정보의 체계적 관리, 고객 센터(Call Center, Contact Center) 공동구축․운영을 통한 과학적 마케팅 활용 등을 통해 인삼의 생산과 유통 체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토론자들은 고려인삼의 중국원산지 주장은 큰 틀에서는 중국의 의도적 역사왜곡으로 보볼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고려인삼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간 체계적 연구가 소홀하였고 홍보 및 글로벌 마케팅 전략 등이 미흡하였기 때문에 이제 고려인삼의 국제적 명성이 훼손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이에 대한 국가전략 차원의 적극적인 대처를 당부했다.

한편 이번 행사를 개최한 이완구 충남지사는 오랜 세월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쳐온 고려인삼의 위상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맞아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고 범국가적 차원의 고려인삼의 세계화 촉진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기를 희망하면서 이번 심포지엄을 준비하였다고 말하면서 한국 인삼산업의 중심고장인 충청남도는 앞으로 고려인삼의 글로벌 마케팅을 위하여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해 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