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처음으로 피아노 반주맞춰 노래부르다
고3, 처음으로 피아노 반주맞춰 노래부르다
  • 편집국
  • 승인 2006.03.1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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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의 입문Ⅰ

누군가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했고 열심이었던 적이 언제냐?” 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곤란할 것 같다. 고교시절을 또래와 달리 유난스럽게 보낸데 이어, 졸업을 하기도 전에 이미 사회로 뛰어들게 된 나의 인생이기엡. 학력고사를 보고난 다음날부터 레스토랑 DJ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나는, 군 복무기간 3년을 제외하곤 주위 사람들이 ‘나이를 생각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했고, 대학 재학시절과 졸업 후 지금까지도 정말 유난히 바쁘게 세상을 살고 있다. 부유하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청춘을 군대에서 보내신 엄부시하에 2녀 3남중 막내….

▲ 김상균 팀장 / 대전문화예술의전당 홍보팀 인생은 주어진대로 살게 내버려두지 않았다.레슨비 지원이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지만 레슨이 필수여야만 했던 음대를 가게 됐고, 갖가지 아르바이트는 물론 방송국리포터, 시립합창단원, 오페라단 사무국장, 음악협회 총무이사, 여성합창단지휘자, 기획사 대표, 오케스트라단장 등 일을 해오다 현재에 이르게 됐다. 일반인들에게는 희귀한 직종이었다. 마지막 종착역이 될지도 모르는 공연기획일은 더더욱 그렇다. 삶의 목적 없이 주어진 상황에 최대한 충실하는 것이 인생관이었고 겉넘지 않고 자만하지 않는 것이 또 하나의 가치관이었다. 방송으로 사회를 접했고 음악가, 기획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 그런 나의 관념으로 의해 낙오자가 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나는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문화에 관한 그리고 공연과 무대에 관한 주변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발행인이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못느낄 때가 언제가 될런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독자들을 만나야하는, 내 인생에 또 하나의 번거로운(?)일이 될 것이다. 때로는 공적인 변(辯)이 될 것이고 다분히 사적인 이야기들도 많을 것이다. 이번호는 첫 번째 순서로 현재 내가 이런 일(공연기획자)로 접어들게 된 계기와 그 당시 내게 자신도 모르게 가치관을 심어주셨던 한 은사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사적인 이야기지만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문화에 종사하거나 이제 막 이쪽 일에 눈을 돌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떤 공명심을 가져야 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고자 함이다. 고교 3년 동안 모교에서 난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방송이 좋아 입학하자마자 방송부에 들었는데, 당시 미술실 한 곁의 커텐안에 케비넷 두개가 방송실의 전부였다. 그렇게 시작한 방송부가 3학년 때는 교실 2/3정도 되는 독립공간에 장학생 3명을 확보한 대단한(?) 특별부가 되어 있었다. 나는 3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조회시간 후미의 ‘명상의 시간’과 점심, 하교시간에 유익한 다채로운 학교 로컬 프로그램을 운영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전MBC 학생 리포터로 발탁되어 공중파를 타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더욱이 공고 지원을 희망했던 나름대로의 적성을 살려 웬만한 방송기자재 및 유선 보수공사를 직접 수리해 학교의 예산 절감에도 막대한 공헌을 했다는 선생님의 말씀도 기억난다. 그러나 그런 재미와 보람에 마냥 취해 있을 시기는 아니었다. 3학년 1학기말 진학하고자 하는 대학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있을 때였다. 바로 옆 반이면서 교내 유일하게 성악을 전공하고 있던 친구가 잠시 면회를 요청해 왔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조금 불편했던 그 친구는 항상 우산을 지팡이 삼거나 자전거를 의지하면서 학교를 다녔고, 나하고는 별로 가깝게 지내지 않았었다.
“너 대학 어디 갈꺼니?”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아니었기에 당황했지만 진지하게 묻는 그의 표정에 진실되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고민이야. 가고 싶은 데가 있긴 한데, 성적도 그렇고… 고민만 하고 있어.”
“그럼 너 성악전공해서 음대 가라. 내가 1학년 때부터 레슨받으면서 성악 공부하고 있는데 네 목소리 들으면 질투가 나거든!”
내가 방송반이라 스피커를 통해 나가는 목소리는 지겹도록 들었겠지만, 말소리와 노래는 엄연히 다른데 그런 중대한 주문을 하는 친구가 이해되지는 않았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보문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 차가 다니는 큰 길까지는 별로 민가가 없었고, 밤늦게 자습하다 학교를 내려오면서 나는 가까운 친구들과 동네가 떠나가듯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큰길까지 내려왔었다. 어느 정도 기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노래 소리를 들으려 노력하는 성악가 지망생이 있었고, 그 소리에 반한 친구가 그때 날 당황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누나와 형들이 많았던 터라 피리(리코더)와 하모니카를 불고 기타 치며 노래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배웠고, 2학년 때 음악선생님께 끌려 개교기념행사에서 합창한 것과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문화원 산하로 있었던 고교 합창 동아리인 ‘목요음악회’회원이었던 것이 음악 인연의 전부였다.

그 다음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친구가 이끄는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 친구의 레슨 선생님께 테스트를 받았다. 그날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풍금이 아니라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음악시간에 배웠던 가곡을 낯설게 불렀고, 잘한다는 칭찬과 지금 시작해도 충분하다는 말을 들으며 더 고민에 휩싸이게 되었다. <계속>


이번호부터 대전문화예술의전당 홍보팀 김상균 팀장의 예술마당 코너가 연재됩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독자여러분들의 많은 성원과 관심바랍니다.

김상균 팀장은 남대전고등학교와 충남대 예술대학 음악과를 졸업했으며, 대전MBC Reporter, 충남대 예술대학 음악학부 동문회장 및 총동문회장, 대전시립합창단 상임단원, 사) 한국음악협회 대전시지회 총무이사, 대전동구여성합창단 상임지휘자, 대전오페라단 사무국장, 한국공연예술학회 홍보이사를 역임했다. 또한 D、art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초대단장을 맡았으며 대전예술기획 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대전문화예술의전당 홍보팀장과 사)한국음악협회 대전광역시지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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