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대전음악인 모두를 알게 되다
어느새 대전음악인 모두를 알게 되다
  • 편집국
  • 승인 2006.05.06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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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생Ⅰ
김상균 팀장 / 대전문화예술의전당 홍보팀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에 대한 질문을 가끔 받는다. 공인으로서, 특별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취재대상으로서 말이다. 그때마다 난 “앞으로도 그렇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인생의 목표가 없었다”고 대답한다.

난 목표가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다만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산다는 것이 가치관이라면 가치관일 수 있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 “일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달갑지 않은 부러움(?)을 사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김상균 대전문화예술의전당 홍보팀장
1988년 대전에 오페라단이 창단되었다. 그 해 난 학교에서 학회장을 맡고 있었고, 전년도에 있었던 학내소요사태 후유증으로 학과에 신경써야 하는 일이 많았지만 선생님께 코가 꿰어 창단공연준비를 돕게 되었다. 당시는 대전이 충청남도에서 대전직할시로 분리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음악협회 또한 대전직할시지회로 분리되어 1대 지회장이 선출되었다. 그 지회장님이 주축이 되어 약 6명의 교수와 선생님들이 모여 오페라단 창단을 준비했다.

87년도인가? 대전시민회관 무대에서 타 지역 오페라단의 원정공연으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공연했던 적이 있었지만 대전에서 오페라를 제작하는 것은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드디어 의식있고 책임감 있는 일부 선생님들이 모여 대전의 문화가 성큼 성장할 수 있는 거대한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작업 한 구석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던 내가 끌려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는 일만 했다. 연습시간이 정해지면 30분 정도 일찍 연습장에 도착해 의자와 보면대를 깔았고, 연습 중에는 선생님들 심부름을 하거나 악보를 보며 공부했다. 연습이 끝나면 연습장을 정리하며 청소했다. 처음에는 시키니까 했고, 조금시간이 흘러서는 성악을 전공하고 있는 나로서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존경하는 선생님들 일을 돕는 것이었기에 묵묵히 임했다.

1988년 10월 대전오페라단 창단 작품은 환경이 환경인지라 제대로 된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는 못했다. 베르디의 오페라 <춘희>중 한 개의 막과 우리 오페라 <춘향전>중 역시 한개 막을 연습하여 창단공연을 치렀다. 무대 장치는 배재대학교 미술과 교수님께 부탁하여 합판에 그림을 그려 몇 개 매달았고, 오케스트라도 없이 지휘자와 피아노로만 공연했다.

당시 대전의 최대공연장이었던 시민회관이었지만 오케스트라 피트(pit)가 없어 맨 앞줄부터 세 줄의 의자를 떼어낸 뒤 검은 천을 둘러 오케스트라 피트를 만들고, 거기에 피아노를 내려놓고 반주자와 지휘자가 위치했다. 그렇게 대전의 오페라가 태동했다.

각자 주머니를 털어 제작비를 충당했고 만방으로 표를 팔러 다녔던 선생님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진다. 그래도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은 웃음이 절로 나온다.

현재 내가 일하고 있는 대전문화예술의전당 무대 시스템을 시연하며 사회를 봤던 2003년 9월 어느 날, 난 무척이나 그 당시의 일이 떠올랐고 감개무량했다. 대전 공연역사의 한 곁을 지켜왔던 내게는 가슴 벅찬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대전에서 최초의 오페라를 제작했던 1988년부터 대전문화예술의전당 개관 때까지의 일들을 이야기하면 몇 날 밤 해도 부족하겠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고 나름대로 일을 잘 하기위해 노하우도 쌓았다. 무대작업 할 때는 그림 그려진 합판을 직접 나르고, 목수아저씨의 일을 도와 망치질과 톱질도 했다. 연습광경을 계속 지켜봤던 나에게 조명 오퍼레이터의 임무가 주어져 공연 때 조명실에 앉아 조명기를 조작하기도 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오페라도 커졌고 내게 주어지는 일도 많아졌다.

90년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일과는 더욱 바빠졌다. 아침 일찍 방송국을 출근해 오후 3시와 6시 타임 방송을 준비했고, 10시부터는 시립합창단 연습, 오후 1시부터 7시까지는 하루 두 꼭지의 방송을 소화했다. 밤에는 오페라 연습장에 가있는 날이 많았다.

92년 봄, 음악과 방송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에 역부족을 느끼고 방송을 접은 후 조금은 여유있게 지내려했지만 일복이 많은 놈의 생활에 여유는 없었다. 음악협회 사무국장의 직함이 내려진 것.

그즈음 미래를 생각해 한 달 동안 컴퓨터 학원을 다녔던 것이 그리 도움이 될 줄 몰랐다. 그 전까지는 공문을 하나 만들더라도 타자를 이용했지만 286컴퓨터로 문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음악인중 최초였지 않나 싶다.

익숙한 사람이 만들면 20분 정도면 될 문서들을 4시간 이상 작업해야 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이제 와 이야기지만 그때는 만들던 문서가 외 그렇게 갑자기 화면에서 없어져버렸는지…. 컴퓨터 왕 초보의 서투른 조작 때문이었겠지만 그래도 난 선구자였다. 오페라 연습일정, 음악협회 명부 등 문서를 만들어 디스켓에 저장하기 시작했고 반복해서 관리했다.

나날이 비중 있는 일들이 많아졌고 언제부터인가는 모든 일이 내손을 거쳐야 되는 정도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나 자신은 여전히 어리고 작게 느끼고 있었다. 90년대 중반 어느 해 음악협회 신년교례회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회장님이 원로 선생님들을 먼저 소개하고 갑자기 마이크를 넘기면서 나머지 회원 인사는 사무국장이 진행을 하라고 하시는 바람에 얼떨결에 마이크를 붙잡고 참석한 80여명의 음악인들의 현 근무처와 이름을 소개한 적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얼굴만 보고 회원들의 근무처와 이름을 소개한 후, 만찬을 유도하고 단상에서 내려오는데 한 원로선생님이 스쳐지나가는 내손을 붙들고는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외우고 있냐”면서 웃으신다. 순간 머뭇거리며 웃음으로 답하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참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참석한 사람들이나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이미 모두 알고 있었고 그 사람들 또한 모두 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덧 대전음악계에서 내 위치가 상승해 있었음을 느끼게 해줬던 조그만 사건이었다.

난 여전히 목표없는 삶을 살고 있다. 월급도 없었던 오페라단과 음악협회였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만 했고, 묵묵히 하다보니 내가 가는 길이 열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96년 결혼하고 한 일년쯤 지났을 무렵, 아내가 짜증 반 핀잔 반 섞여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살어?” 여름부터 초겨울까지는 더욱 바쁜 시기였다. 매년 10월에 오페라가 있었고 음악협회의 큰 사업들도 몰려있었기에 자정을 넘기고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런다고 월급을 받고 하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아내의 핀잔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난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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