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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립예술단은 지금처럼 직업화 되어 있지는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 저녁 7시에 모여 2시간 동안 연습하고 한 달에 교통비 명목으로 5만원을 받았다. 86년 7월부터 소수 상임단원 TO가 생기기 시작했고 90년에 이르러서는 전 단원 상임제가 되어 지금처럼 전문합창단의 구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상임단원으로 오디션을 볼 수 있는 자격은 성악전공을 한 대학 졸업자였기 때문에 90년까지는 비상임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90년에 오디션을 거쳐 상임단원이 될 수 있었다.
지난번에도 잠깐 거론했지만 정말 정신없이 지냈던 기간이었다. 88년 대전오페라단이 대전음악인들의 힘으로 창단된 후 총무의 역할을 시작했고, 시립합창단 상임이 되고부터는 매일 출근. 그리고 고교시절부터 발을 담그고 있던 대전MBC에서는 대학 졸업 때부터 정식 리포터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대전의 매니지먼트(management)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80년대 대전에서 클래식 매니지먼트를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워낙 시장형성이 되지 않았던 시기라 많은 어려움을 겪고 문을 닫아야 했지만 대전의 클래식 매니지먼트 역사에 디딤돌이 된 분임에는 틀림없다.
아직도 서울에 있는 일부 원로음악인들이 그의 이름을 떠올릴 정도인 것을 보면 많은 이야기꺼리가 있는 듯하다. 92년, 드디어 젊고 뜻있는 음악인들 몇 명이 모여 <대전예술기획>이라는 클래식 음악 기획사를 창립했다.
물론 필자는 그 이전부터 시립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대전오페라단과 음악협회의 사무업무를 맡고 있었지만 이 기획사 대표를 만나게 된 것이 지금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이 든다.
당시 필자는 대전MBC 현장 생방송 리포터를 하고 있었고 대전에 클래식 기획사가 생겨 최초의 공연을 기획한 것을 취재하여 라디오 생방송으로 인터뷰를 했다. 한 사람은 음악인이자 방송국 리포터의 신분이었고 또 한사람은 기획사 대표로 말이다.
그 이후 우리는 가까운 동료이며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 방송 일만 빼고는 동질의 일을 하고 있었고 같은 연배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런데 7년 후인 1999년. 그 친구가 건강이 안 좋아져 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게 됐다. 어려움 속에서 끌고 왔던 사무실을 더 이상 유지 못 할 위기에 처하자 필자에게 사무실 인수를 권했다.
그동안 기획사의 일을 조금씩 도와 오면서 봐왔던 것은 문화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대전이라는 도시에서 클래식 음악 기획사를 꾸려간다는 것은 평범함을 넘어 공명심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느꼈던 터라 필자는 쉽게 수락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친구의 간곡한 권유가 계속되었고 이미 지역공연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필자에게는 누군가 유지를 해야 하는 일이라는 공명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때마침 IMF물결을 타고 시립예술단 구조조정이 있었는데 실기보다는 과외로 기획일을 많이 했던 필자는 정리 대상이 되어있던 터. 기획사를 인수하기에는 시간이나 환경적으로 모두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이미 오래전 방송일은 정리했었고 14년여 동안의 시립합창단 생활과 5년 동안 지휘를 했던 <동구여성합창단> 등, 무대 위의 생활을 정리하고 그때부터 순수한 기획자의 길만 걷게 되었다.
기획일이라는 것…. 특히 좁은 지역사회이기도하면서 시장이 열악한 도시에서의 기획일은 결코 녹녹하지가 않다. 직원과 함께 새벽에 퇴근하는 것은 일반적이고 날밤을 새야하는 일 또한 빈번했다. 단순히 공연기획일로는 수입을 기대할 수 없기에 공연에 필수 동반되는 인쇄기획 일까지 하고 있어 더욱 고될 수밖에 없었다.
연주자는 음악만 준비하고 기획자는 공연장 대관부터 홍보, 당일 공연진행까지의 모든 일을 맡는다. 때로는 남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고고한 기획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연주자들의 심부름꾼이기도하고 공연장 스태프들과 관객의 눈치를 봐야하는 일까지 기획자의 몫이다.
대전문화예술의전당 개관준비팀으로 일하기 시작한 2003년 7월까지 1년에 40~50건의 공연을 치러왔고 그 중 대행이 아닌 순수한 기획공연은 연10건 이내였지만 흑자를 낸 공연은 한 손안에 꼽는다. 인쇄기획과 대행공연을 하며 사무실을 유지하고 돈을 모았다. 기획공연을 하면서 쏟아 붓는 형태였다.
대전예술기획을 보는 시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워낙 많은 공연을 소화하고 있었고, 시내에 배포되는 공연인쇄물중 약60% 이상이 이쪽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커다란 기업쯤으로 알고 있는 부류와 나름대로 속사정을 알아 어떻게 사무실을 유지하는지 신통하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독자들은 어느 쪽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대전의 문화발전을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해 왔던 사람들의 흔적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생계수단으로 영리를 위해 사업을 한다지만, 이 분야만큼은 영리보다 공명심을 위한 사업이 아닌가 싶다. 공연자들처럼 자기만족을 위해서라고 할 수도 있다.
비록 적자를 본 기획공연이라 해도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이 감동을 얻어가는 모습과 공연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을 때 드는 보람은 경제적 가치로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누군가는 지역을 위해 해야 할 일이라는 것과 문화예술의 부가가치를 인정받는 미래비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대전은 대전문화예술의전당 개관 이후 짧은 기간 동안 놀라운 발전을 이루고 있다. 이는 환경을 만들고 투자하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전당 개관 이전부터 이미 대전의 공연은 많아져 있었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무대를 만들어왔던 예술가와 기획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다져진 배경에 전국 최고의 시스템과 운영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전당이 개관했고, 과감한 투자로 그동안 영세했던 기획자들이 엄두도 못냈던 세계정상급공연들을 유치함으로써 문화도시 대전의 위상을 세울 수 있었다.
이제 후퇴해서는 안 된다. 문화는 혁명으로 이루지 못한다. 다만 정책으로 인해 세월의 길고 짧음이 정해질 뿐이다.
각 분야에서 오랜 기간동안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정치와 연계해 혁명으로 문화를 이룰 수는 없다.
순수예술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순수한 창작활동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를 인간이 향유함으로써 삶의 진정한 가치와 해탈이 다시 일상의 활력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업예술인 대중예술과는 달리 취급받는 것이다.
음악을 전공하고 20년 가까운 세월을 공연장에서 지내왔는데 이제야 공연을 보며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느낀다. 공연장에도 기(氣)가 존재한다. 1,000석 공연장에 불과 100명의 관객이 모였다 해도 무대에서 펼치는 예술가들의 행위에 몰입하는 관객들의 기(氣)를 느낄 수 있다.
예술가들은 관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 기(氣)를 느끼면서 투자의 아픔을 잊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100명의 관객이 4,000만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