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왠지 무미건조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아픔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처럼 또 다른 사랑이 찾아 왔을 때, 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고자 할 것이고 때로는 또 다른 이별로 다가올지 모르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이별주머니를 차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과의 이별만 그럴까? 아마도 세상의 짊을 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라면 직업을 바꾸거나 직장을 바꿀 때도 겪어야하는 고통이 클 것이다. 그것이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관계없이 말이다.
92년도까지 음악과 방송을 겸하다가 방송을 포기했다. 매일 하루 절반 이상을 투자하던 방송을 접고는 한동안 허탈하고 망망했던 기억이 있지만
이내 또 다른 일들로 그 공간을 메웠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15년 동안 몸담아왔던 시립합창단을 그만둬야 했던 99년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 많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음악협회다 오페라단이다 하며 다른 일에 몰두했고
정작 실기를 등한시했었기에 단원평정에서 보기 좋게 미역국을 먹었다. 사실 당일 컨디션이나 평소의 생활과 능력보다도 약 10분간의 평정에 의해
실력을 판단해서 해촉하는 이해 못할 제도에 의해 정리가 되었지만 평소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기에 당연하다고 자위하며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비록 그런 결과가 인과응보이지만 당시에는 참 막막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처럼 합창단 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쌓였던 공연기획 분야와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대전 유일의 클래식 기획사를 운영하던 친구가 신병의 이유로 회사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된 것을 인수받고 또 다시 다른 생활로 접어들었다. 기획사 대표. 이를테면 세 번째 직업이다. 당시에는 그 기획사가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
될 줄 알았지만 인생은 마치 짜여져 있는 퍼즐과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시립합창단 생활을 하던 96년도에 대전문화예술의전당(착공당시의 명칭은 ‘한밭문예회관’이었고 2000년에는 ‘한밭종합문예회관’,
2001년에는 ‘대전종합예술의전당’이라 불렸음)의 착공식에 참여해 축가를 부른 적이 있고 기획사를 운영하던 시절에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저절로
많은 관심이 생겼다. 한편으로는 예술인들과 시민들의 관심이 저조한 것에 안타까워하며 나름대로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00년부터 기획하는 큰 공연의 팸플릿 한 면에 한밭문예회관 건립에 대한 광고를 하기 시작했다. 조감도와 공사개요를 게재하고 “대전문화예술의
메카! 예술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한사람이 벽돌 한 장 쌓는 마음으로 시민 여러분의 애정과 관심이 필요할 때 입니다”라는 문구를 넣어
공연장을 찾는 시민들에게 대전에 예술회관이 건립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유도했다. 대전에 이런 시설이 생긴다는 것에 모든 시민이 관심과
자긍심을 가졌으면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말이다.
몇 차례에 걸쳐 공사완료시기가 늦춰진 후 드디어 2003년 10월로 개관일이
가시화 된 시점이 2003년도 들어서였다. 연초에 개관준비팀이 구성된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어떤 사람들로 구성이 되는지는 몰랐다. 대전이
공연자들이나 관객 인프라만 저조한 도시가 아니었고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공연기획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또한 한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대전인력을
확보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개관준비팀장(현재의 조석준 관장)과 무대전문 인력들로 구성된 인원들이 서울에서
구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만 공연기획분야를 맡을 인력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공연기획분야에 종사할만한 대전사람을
추천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주변에서 움직이고 있던 후배 몇 명을 추천했다. 그리고 끝말에 “당신은 생각없소?”라는 질문을 받았다. 순간 좀
당황스러웠다.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가면서 “글쎄요 생각해보지 않았네요”라고 답했다.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추천하는 사람들의
약력과 함께 내 약력도 함께 보내달라는 말을 듣고 헤어졌다.
그 며칠 정말 많이 고민했다. 처음 기획사를 인수하면서부터 밤을 낮
삼아 고생하던 동생 같은 직원 걱정이 가장 컸지만 또 다시 새로운 일을 하고 싶은 욕구가 없지 않았다. 이윽고 직원과 어찌될지 모르는 거취에
대한 불분명한 상의를 한 후 또 다시 그런 제의가 들어오면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고 하듯 그토록 중요하기에 어찌될지 모른다는 전제아래 똑같은 질문을 받았고 불러주면 가겠노라고 대답했다. 그해 4월, 서울에서
스카웃 된 사람들로 개관준비팀이 구성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공연기획분야는 채용하지 않았었고 너무 시간이 많이 흐른 탓에 그 일을 묻어두고
사무실 일에 전념하고 있을 때였다. 가깝게 지내던 선생님께 이상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시에서 너에 대해서 물어 보더라, 어느 정도 결정이
된 것 같던데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어떻게 진행이 된거냐, 너 답다”…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 선생님은 친형님과 다름없이 가깝게 지내던
분이었고 시의 문화행정에 여러 가지로 자문을 하는 위치에 있는 분이었기에 당신한테 상의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은 것에 서운하긴 했지만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축하와 확인을 하기 위한 전화였던 것이다. 순간 또 당황스러웠다. 사실 연초에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은
있었지만 5개월 이상이 지난일이라 신경을 끄고 지냈노라고, 그 이후로 전혀 이야기를 들은바가 없었노라고 답변을 하고는 혼란스러움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했었다.
2003년 7월 15일. 개관준비팀으로 두 명이 추가 위촉장을 받았다. 한명은 기획담당이고 한명은 홍보담당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게 기획사를 넘겨줬던 친구가 몸을 추스른 후 또 다른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두개의 기획사를 합치는 형식으로 사무실을
되돌려 주고 함께 일했던 직원도 그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한 뒤 사무실을 정리했다. 10월 1일이 개관날짜로 잡히고 2개월여 만에 개관기념축제를
치러야했다.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인원이 보충되어 짐을 덜었지만 공연이란 막이 오른 후보다 막이 오르기 전까지가 더욱 중요하고 바쁜 일이
많다. 22건의 개관기념축제를 기획담당자와 함께 셋팅을 해야 했기에 새로운 일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라면 그냥 “정신없었다”는 한마디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게 문화예술의 메카에 들어왔다. 네 번째 직업이다. 방송, 음악인, 기획사 대표, 공연장 홍보팀장. 연결고리는 형성되어 있는 것 같지만 순간순간 옮겨 타면서 겪은 고민과 번뇌들은 다시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3년이 지났고 내 인생에 맞춰지는 다음퍼즐이 무엇이 될지 고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