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면서 겪었던 신기한 사건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나는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몸이 몹시 허약했었다. 세수할 때 코피를
쏟거나 음식을 먹고 체하기가 일쑤였고, 체했을 때 토하는 것은 기본이며 심지어는 감기만 들어도 토하기를 자주했다. 시내버스를 타도 멀미를 해서
버스바닥에 토했던 일과 언젠가는 온몸이 마비가 되서 전신에 40여개의 침을 꽂아보았던 일 등이 있고, 그밖에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자주
아팠다. 그런 상태에서 중학교에 진학하고 1학년 1학기 어느 날, 어머니가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조퇴를 하고 오라하셨다. 아무리 아파도 학교를
보냈고 웬만큼 아파서는 조퇴가 용납이 안됐던 어머니였는데 아프지 않고 학교 잘 다니고 있을 때 조퇴를 하고 오라고 하시니…. 중학교에 들어와서도
몸이 허약했던 막내가 안쓰러우셔서 누군가에게 용하다는 곳을 들으시고 치료를 하러 데려가시는 것이었다.
시내버스에서 시외버스 두
번을 갈아타면서 ‘주봉’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시내버스만 타도 멀미를 했으니 내 상태가 어땠으랴. 오바이트를 받아내는 비닐봉지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거의 탈진 상태로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어머니가 등을 한참 두드려주셨고 잠시
몸을 추스른 후 어느 허름한 시골집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한 분과 손님인 듯한 아저씨가 계셨다. 할머니는 그 아저씨를 방에 눕히고 배를
드러낸 다음, 아랫목에 있는 이브자리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저씨의 배위에 갖다 대고는 또 무언가를 했다.
이윽고 차례가 되어
나는 할머니 앞에 가서 앉았다. 한쪽 무릎을 세운 자세로 앉아 내 왼쪽귓불을 만지작거리며 한참동안 내 눈을 쳐다보시다가는 어머니에게 호통을
치셨다. “왜 애를 이지경이 되도록 내비러 뒀어!” 어머니는 “멀미 때문에 탈진해서 그래요”라고 대답했지만 할머니는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는 줄
아느냐면서 잠시 실랑이를 한 후, 나를 자리에 눕히고는 앞에 아저씨에게 했던 그 무언가를 했다. 아랫목에서 꺼낸 것은 숯불을 넣고 사용했던 옛날
다리미였고 그 안에는 온갖 식용동물의 뼈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 다리미를 가슴부터 아랫배까지 쓸어내리려 했다. 그러나 풀로 붙인 듯 꼼짝하지
않는다. 한 개의 뼈를 꺼내놓고 또 쓸어내리려 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서너개의 뼈를 꺼내고 난 다음에야 다리미가 아랫배로 쓸어
내려졌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할머니의 본격적인 치료가 있었다. 꺼냈던 뼈를 다시 하나씩 집어넣으면서 다리미가 쓸어내려지도록 무언가 주문을 외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음식으로 인해 만성적으로 쌓여있던 체기를 내리는 것이라 들었다. 앞에 아저씨는 단 한번이었는데 그 과정을 서너번 반복하고
나서야 끝났다.
난 지금도 그때의 상황이 생생하다. 귓불을 만지며 내 눈을 쳐다보던 그 할머니의 눈빛은 남들과는 다른 색이었지만
푸근했고 따뜻한 다리미가 가슴에 붙어 있을 때의 느낌과 쓸어내려질 때의 느낌들이 생생하다.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신기하게도 그 일이 있은 후
지금까지 크게 아파본적이 없다.
둘째,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실내화를 신고 교사를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많았다. 화장실이나 수돗가에 갈 때도 시멘트로 만든 땅위의
그 징검다리를 디디고 다닐 수 있도록 되어 있었으니 징검다리 형 야외복도라고하면 이해가 쉬울지 모르겠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친구와 그 위를 뛰어가며 장난을 쳤었다. 양말을 신고 다닐 때도 아니고 그때의 실내화는 맨발에 땀이 차면 무척이나 미끄러운 고무재질의 하늘색
슬리퍼였다. 아마 우리 세대는 모두 그 실내화를 신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실내화를 신고 도망가는 친구를 잡으려 징검다리를 뛰어 갈 때
미끄덩하면서 넘어졌다. 도망가던 친구는 한 5미터 이상 앞서 있었고, 넘어지는 충격은 엄청나게 강했다. ‘쿵’하면서 사각으로 된 시멘트
징검다리의 날카로운 부분에 내 귓불 밑이 닿았으니 순간적으로는 한쪽귀가 밀려 떨어져 나갔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부딪힌 충격만
있을 뿐 귀는 멀쩡했다. 당시 정황은, 5미터 이상 앞에서 도망가던 내 친구의 실내화가 내 귀불 밑에 끼어 있었다. 실내화는 고무재질이었기
때문에 귓불과 날카로운 시멘트 징검다리 모서리로부터 내 귀를 보호했던 것이다. 도망가던 친구가 나를 일으켜 세우면서 “괜찮아? 어! 내 실내화가
왜 여기에 있지?” 그 친구 말이 자기는 실내화가 벗겨졌었는지도 몰랐었다고 했다.
셋째, 집안에 막내이다 보니 초인종이 울리면 몸이 반사적으로 튕기며 일어나서 대문을 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쯤이다. 1층 슬라브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었고 부엌에는 연탄을 쓰고 있을 때다. 우리 집 안방은 마루로 나가는 유리문 외에 부엌으로 나가는 나무문이 있었고 그 문 앞이 내 잠자리였었다. 어찌보면 부엌으로 나 있는 나무문에 코를 갖다 대고 잠을 자는 형태였었던 것이다. 어느 휴일아침에 초인종 소리를 듣고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켜 마루와 마당을 지나 집 모퉁이를 돌아서 대문을 열었다. 우유 아줌마가 우유를 주면서 대문 앞에 서 있었고 난 우유를 받아들고 마당을 걸어올 때 정신을 잃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몸에 한기를 느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마당에 누워있었다. 순간 연탄가스를 마셨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안방으로 돌아올 때 주무시고 계시는 어머니 아버지가 걱정이 되었다. 안방으로 돌아와 보니 다행히 부모님은 아침운동을 하러 밖에 나가시고 없었다. 어머니는 연탄불을 갈고 운동을 가신 것이었고 부엌문에 코를 향하고 자던 나는 연탄가스를 꽤 많이 마셨던 것 같았다. 그런데 이해 못할 일이 있다. 초인종을 눌렀던 우유아주머니는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초인종을 누른 적이 없다. 항상 대문 앞에 걸어놓은 주머니에 우유를 넣고 갔었기 때문에 말이다.
어떤 영적인 존재가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본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6개월 독학으로 성악과에 입학했던 일을 비롯해 그 동안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나의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정해놓은 길을 가는 듯한 느낌을 가끔 받는다. 방송을 그만두고 시립합창단을 그만두고 기획사를
그만두고 대전문화예술의전당에 들어와서 일을 하게 되기까지 아주 짧은 기간이라도 공백이 없었다는 것도 그렇다. 수입원이 바뀌는 순간에도 일에
치이면서 지내왔기 때문에 아내가 지어준 ‘30분 아빠’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기획사를 정리하고 대전문화예술의전당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말을 했을 때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역시 아내였다. 시사업소의 공무원 신분이니 ‘30분 아빠’라는 별명이 없어지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2003년 7월 15일 임용장을 받고 개관준비에 여념이 없는 상태에서 한 달가량 지났을 때 출근하는 나한테 아내가 한마디 던졌다.
“전당에 간다고 좋아했드만 한술 더 뜨시는구먼~”. 그도 그럴 것이 한 달여 동안 새벽 2시 이전에 귀가해본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렇게 별명을 유지하며 전당에서의 인생이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