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출신 외국인 총장으로 ‘과학계의 히딩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카이스트를 초일류 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로버트 러플린. 그러나 한국은 그의 연임을 반대했고 지난 7월 14일 새벽 그는 한국과 작별을 고했다.
출국하기 하루 전인 13일 오전, 러플린이 총장 재임기간 동안 머물던 관저에는 10여명의 카이스트 학생들이 모였다. 한국을 떠나면서 갖는
학생들과의 마지막 대화시간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저서에 학생들의 이름을 일일이 한글로 새겨 사인(Sign)을 하고 기념촬영도 했다.
그의 연임을 받아들이지 않은 한국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남아있을 법도 했지만 표정은 밝아 보였다.
인사권, 예산운영권 없는 명목상
총장
출국 전 그가 내놓은 에세이집 ‘한국인, 다음 영웅을
기다려라’에서는 카이스트 총장 재임(2004년 6월부터 2년간)기간 동안 자신이 겪었던 경험담과 심경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는데 그리 좋은
기억만은 아니다.
특히 국립대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는 러플린의 ‘과감한’ 혁신정책은 외국인 총장에 대한 카이스트 내부의
반발을 더욱 심화시켰다. 러플린은 무엇보다 대화와 논의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의 생각을 알리고 교수들의 의견이 어떤지 듣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개혁을 추진하고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러플린의 바람일 뿐이었다.
“교수들은 한국 상황을 모르는 외국인이 자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과도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교수들과 대화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고 교직원들마저 내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인사권과 예산운영권이 없는 명목상 총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외국인 총장은 개혁의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채 2년 만에 쓸쓸하게 한국을 떠나게 됐다.
한국은 개혁보다 평화를 선택했다
“한국은 개혁보다 평화를 선택했다.” 연임이 거부되고 난 후 러플린이 했던 말이다. 러플린은 카이스트의 문제는 과학이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
“소위 ‘카이스트 문제’는
교수와 교직원들로부터 제공된 내용들이 대중에게 알려졌다. 나와 직접 인터뷰한 몇 안되는 보도내용들이 카이스트 측을 통해 보도된 내용과 달랐던
것도 이 때문이다.” 러플린은 자신이 떠나는 시점에서 에세이집을 낸 이유도 ‘대외적으로 언론 접촉을 하지말라’는 지시가 있었고 상급기관의
말을 따라야 하는 입장에서 이를 수용했다고 밝혔다. 혁신적인 로드맵으로 개혁을 시도하고자 했던 그는 결국 2년 동안 내·외부와 단절된 채 고립무원의 상태로
지내야 했고 개혁의 주체가 아닌 객(客)으로 지낼 수 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한국을 떠나며
“한국과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에세이집을 냈다. 한국은 내 인생의 일부를 보낸 곳이기에 의미있는 나라다. 앞으로도 한국을
사랑할 것이고 한국 과학과 교육의 발전에도 힘쓸 것이다. 한국이 필요로 한다면 카이스트 자문역도 맡을 생각이다.”
물리학자에서 작가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는 로버트 러플린. 그는 이번 책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엮어 두 번째 책도 낼
생각이다. 한국과의 계약이 만료된 만큼 이제는 하고 싶은 말들을 수록할 생각이란다. “노벨상을 받았다고 해서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 교육계 문제의 해결 방안에 대해 물어보는데 자신의 문제는 타인이 해결해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조언은 해 줄 수 있다. 이번에 낸 책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또 한국과학이 이렇게 해라’가 아니라 내가 한국에서
느끼고 경험했던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독자들이 내 제안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수용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주기
바란다.”`
>>로버트 러플린(Robert B.
Laughlin)은 1950년 캘리포니아 비살리아에서 태어났다. 버클리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물리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벨연구소를 거쳐 스탠포드 대학에서 응용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98년 <분수 양자 홀
효과(fractional quantum hall effect)>라는 이론을 세워 현대물리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물리학 이외에도 컴퓨터, 반도체, 핵에너지, 기상학, 제약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다. 낚시와 하이킹, 자전거
타기를 즐기며 특히 피아노에 능통해 여러 편의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또한 평소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그는 이 책에 들어있는
삽화들을 직접 그리는 열정을 보였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증인 아니타 러플린 여사와의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2004년 7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으로 취임했으며, 2006년 7월 퇴임 후 스탠포드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할 예정이다. 저서로는 ‘새로운
우주(A DIFFERENT UNIVERSE)’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