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놈 지랄하고 앉았네.”
밥상머리에 앉아서 밥 먹고 있을 때 어머니의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안 형편 뻔히 아는
놈이 고등학교 3학년, 반을 넘기는 시점에 노래를 시작해 음악대학에 간다면 정상적으로 받아들일 부모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말씀에 난 입안에
든 밥을 뿜어낼 뻔 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계속 우겨본들 평소 막내를 믿고 있는 어머니 가슴에 못만 박는 일이 될게 뻔해 그냥 웃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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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균 팀장 | ||
집에 절대 신세지지 않는다고 결심하고, 처음에는 두 분의 선생을 모셨다. 나를 꼬드겼던 친구한테 발성기초를 지도받고 친구의 실기 선생님께는 무언가 배우러 갔다.
그런데 한 세 번쯤 갔었을까? 우연히 어느 한 여학생을 레슨하시는 것을 보고 다시는 선생님을 찾아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 귀에도 절대 성악을 하지 말아야 될 학생에게 칭찬을 연발하며 지도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레슨비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형편인지라 나는 차라리 이런 모습을 본 것이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 한 분의 선생님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 등교해 1시간, 점심시간 40분, 방과 후 2시간 동안 학교 음악실 피아노는 내 차지였다. 친구에게 레슨받고 양쪽검지 손가락만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가며 연습했다. 물론 집에서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게 말이다.
당시 음악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음악하는 사람은 말이야, 길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 음악냄새!’하고 느낄 정도로 스스로 미쳐야 되는거야!”
그 말씀에 내가 취해야 할 방향을 잡게 되었고, 약 한 달여 ‘미쳐’있을 때 교무실에서 호출이 왔다. 선생님 책상에는 대여섯 개의 음악 콩쿨요강이 놓여있다. 그 중 하나를 택해 신청하라신다. 노래공부 시작한지 한 달 만에 어떻게 콩쿨을 나가느냐고 말씀드렸더니 어이없어하면서 하신 말씀.
“왜 콩쿨나가서 입상하려고 하냐? 목표정하고 준비하면서 연습하라는거야,
임마!”
선생님의 그
말씀은 내가 대학에 진학해서도 계속 지켰다. 오디션이라는 오디션은 모두 보면서 공부했다. ‘준비’가 가져다주는 연습량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떨어졌다는 실망보다는 준비하면서 얻어지는 실력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배웠다.
그 해 10월까지 세 번의 콩쿨에 도전했다. 콩쿨 하나하나에 얽혀있는 이야기보따리들이 있지만 선생님에 대한 추억 보따리만 풀어보겠다. 가까스로 참가비를 마련해 음악협회 콩쿨 신청서를 접수했는데 경연 하루 전까지 반주자를 못 구했다. 남들처럼 레슨선생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반주비를 줄 형편도 못됐다. 생각다 못해 밤늦게 목원대학교 음악관을 찾아갔고 밴드부 출신 선배를 만나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당시 대학 1학년이었던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주었다. 학연의 끈적한 정을 느끼면서 밤늦게 좁은 연습실에서 반주를 맞췄다. 그 다음날 대학 1학년이 반주하기에 까다로운 곡이었기에 쉽지는 않았지만 감사하게 생각하며 무대에 올라 노래했다. 공신력있는 음악협회 콩쿨이라서 그런지 콩쿨이 열리는 호수돈여고 강당에는 심사위원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드디어 내 순서. 모두 일곱 페이지의 곡이었다.
앞부분은 반주와 맞았고 중간은 반주와 엉켜 한손으로 박자를 저어가며 불러야 했다. 또 후반부는 반주가 끊긴 상태에서 끝까지 혼자 노래하고 무대를 내려왔다. 반주도 어려웠지만 무대 경험이 없는 대학 1년생의 초보반주자는 긴장한 나머지 연습한대로 하지 못했고 미안해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하지만 그분께 감사했다. 돌이켜보면 어린 나에게 무대에서 벌어질 수 있는 돌발 상황에 대한 교육을 주었고 무엇보다 중요한건 그분이 없었으면 난 경연에 참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윽고 심사결과 발표. 3등상을 받았다. 현장에 있었던 음악선생님께서 흐믓한 표정으로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시고는 심사위원장이었던 어느 교수님께 인사를 시키셨다.
“어 그래, 반주자가 끊겨 3등 밖에 못줬다”면서 열심히 하면 S대도 무난하겠다는 놀라운 칭찬을 해주셨다. 독학 3개월여 만에 그런 칭찬을 들으면 우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때 내 귀를 잡아끌면서 음악선생님이 말씀을 하셨다.
“귀에도
담아두지 마라!”
난 그런 선생님이 좋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예술인이나 기획자로서 걸어온 길에 선생님의 그런 일침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음악인이 가져야할 마음자세와 공부하는 자세, 그리고 자만하지 않고 성심을 다하라는 교훈을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대전문화예술의 1번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타고난 마당쇠의 기질로 내가 속한 분야에서 만큼은 밑바닥에서부터 배워왔다. 하지만
결코 자만하지 못한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배워나가면서 일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30분 아빠’라는 별명을 붙여준 아내와, 하루에 많으면 30분 정도만 얼굴을 대하고도 아빠를 기억해주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살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먼 훗날 나를 돌아다볼 수 있는 시점에서 내가 어느 콩쿨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러 무대로 올라갈 때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꽃다발을 사다 안겨주며 눈시울을 적셨던 그 친구와 그때그때 나에게 일침의 교훈을 주셨던 선생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고자 다짐할 뿐이다.
/ 대전문화예술의전당 홍보팀 김상균 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