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지혜[앎:智]?
거짓과 지혜[앎:智]?
  • 허정 이상엽
  • 승인 2018.03.07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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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가 되고, 백년 모은 재물은 하루아침에 티끌처럼 사라진다(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 천륜과 인륜 그리고 상도(常道)마저 저버린 채, 옳지 못한[不義] 방법으로 모은 재물이나, 명예는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문구이다.

허정 이상엽

불의에 항거한 정의는 후인에게 교훈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오류를 감추어 두고 대세에 편승하여 얻은 부귀나, 옳은 말을 못하고 시류에 동승하여 얻은 재물, 그리고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하면서 현란한 어휘로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해 얻은 명예나 지위 등은 아침이슬 같이 사라진다.

천륜과 인륜은 모두 진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거짓과 불의, 그리고 파렴치한 행위는 수십 년간 쌓아온 모든 공덕을 일순간 빼앗아 간다. 명예와 재물은 물론 권력도 예외는 아니다. 학문을 연구하고 또 후학을 가르치는 학자[교수·선생]의 신분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심신을 수련하여 자아를 찾고 후학을 양성하는 학자라면 모름지기 옳은 건 옳다고 하고,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 일찍이 자신의 출세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킨 학자는 없었다.

따라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거짓을 방관 내지 옹호하며 능숙한 감언이설로 옛 성인(聖人)의 말씀 운운하며, 성인의 말씀을 무시하고 정직한 사람의 행적을 헐뜯어 욕되게 하며,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학자가 날로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옳은 것[義]을 보고 하지 않는 것은 용기[勇]가 없는 것이다(見義不爲無勇也).”라고 한 <논어>의 내용에 대하여, 주자(朱子)는 “알면서 하지 않으면 이것은 용기[勇]가 없는 것이다(知而不爲是無勇也).”라고 해석했다.

탐욕 감춘 채, 지혜 운운은 견강부회(牽强附會)의 극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 진정한 지혜[앎:知]를 갖춘 용기 있는 사람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불의를 보고 못 본채 눈감아 주는 사람을 누가 쫄 장부의 행위가 아닌 대장부의 지혜로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공자(孔子)님께서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말씀하셨다. 진정한 지혜[앎:智]는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하며 허위를 진리로 둔갑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라는 뜻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라면, 후학을 교육하는 학자라면, 거짓을 진실로 호도하려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무책임한 학자의 한 구절 글과 한마디 말은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칠 기회마저 빼앗아 그 사람을 방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리로 통용되는 이유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정의(正義)와 불의(不義)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탐욕을 감춘 채, 모르는 것을 아는 채하고 아는 것을 모르는 채하는 학자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천륜과 인륜을 모두 저버린 혹세무민(惑世誣民) 행위 또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의 극치라고 한다.

“옛날 학자는 자기[己]를 위해 공부했는데, 지금 학자는 사람들을 위해한다(子曰, 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라고 하신 공자(孔子)님의 말씀을 고려하면,

예나 지금이나 수신을 통해 자신의 자성을 깨닫는데 힘쓰기보다는 자신을 들어내기 위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마음 속 깊이 거짓과 탐욕을 감추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삶을 사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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