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중심지에 가보면 돌이나 철판으로 무장한 채 도열해 있는 지하상가로 통하는 출입구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출입구 모양새가 좀 됐다 싶으면 무표정하기 그지없고, 만든지 얼마 안됐다 싶으면 조잡하거나 엉거주춤한 상태라 영 거시기하다. 이 또한 갑갑한 도시 속에 사는 우리 눈의 충혈을 심화시키는 농도 짙은 자태 중 하나이리라.
그 거시기한 꼴을 피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우습게도 지하상가 출입구에 난 구멍 속으로 빠르게 몸을 던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어 보인다. 주변은 너무나 숨가쁘고, 매캐하며, 또 꽉 차 있다. 그리고 내 몸은 이미 도시의 체감 속도에 무조건적으로 반응할 만큼 민감하게 단련된 상태이기에 참 자연스럽다. 대전의 지하상가 출입구 상황도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신·구 지하상가 모두 그 무식한 구멍들을 열 맞춰 뚫어놓고 우리를 가릴 것 없이 빨아들였다가 내뿜고 있다.
도심 속 거리를 지하화한다는 것은 그 폭의 한계가 이미 설정되어 있고, 택지개발 하듯 땅 속을 분양하는 사업이기에 개발지에서 발생하는 여유 공간 부족의 현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전국 어디를 가나 말이다.
지상에서의 비교적 자유로운 시선은 지하에서는 그 폭에 크게 제한을 받는다. 상당부분을 화려한 상가 조명 아래 진열된 수많은 상품에게로 집중되게끔 제한되어 있다. 이러한 제한은 거리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의 억제를 넘어 상품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즉흥적 소비를 유발시키는, 보이지 않는 ‘삐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시선의 제한을 담보해 낼 수 있는 낮은 천장고와 일정한 가로 폭은 결국 움직임의 규제로 이어져 가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행위의 가능성과 사건 발생마저 억누르는 근엄한 치안 효과로도 작용하고 있으니, 그 속에 빠진 우리의 몸은 이미 우리 것이 아니다. 결국 신·구 지하상가에서는 시선과 움직임의 통제를 통해 더 많은 소비를 부추기는 집요함이 늘상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백화점에 창이 존재하지 않아 시간의 변화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집요함처럼.
이런 상황이 어디 대전의 지하상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인가? 다른 도시 지하상가에서, 아니 지상의 많은 거리에서도 큰 차이 없이 벌어지는 보편화된 우리의 슬픈 일상이리라.
대전에 설치된 지하상가는 대전천을 경계로 대전역 방향의 구지하상가(이하 ‘구상갗)와 도청방향의 신지하상가(이하 ‘신상갗)로 나뉘어 있다. 이 두 지하상가에서 보여지는 차이는 ‘구’, ‘신’이란 말만큼이나 분명해 보인다.
구상가는 가로폭의 변화없이 직선의 형태를 띠고 있다. 신상가는 상가의 깊이를 조절함으로써 직선의 가로가 양쪽으로 양분되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며 변화를 갖는다. 구상가는 그저 하염없이 걸어야 한다. 마땅히 앉을 곳이 없다. 신상가는 중앙분리대 형식으로 벤치와 분수, 조각상 등이 설치되어 잠시 쉴 수 있고, 누군가를 기다릴 수도 있고, 또 여러가지 소규모 공연도 가능하다. 구상가는 전반적으로 칙칙한 분위기다. 신상가는 늘 신나고 밝다. 365일이 축제다. 구상가의 상가들은 퇴역한 군인들처럼 단조롭고 권태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신상가는 펄펄 끓는다. 형편이 이러니 정말 급한 일이 아니고선 누가 구상가의 구멍 속으로 몸을 던지겠는가? 차라리 좀 더 걷더라도 신나고 쉴 수 있는 신상가로 향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구상가의 바닥재와 천장재가 교체되었다. 하지만 인테리어 개념의 탈바꿈은 별 도움이 되질 않아 보인다. 약간의 배려와 상상력만으로 두 지하공간의 성격과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로 인해 신상가가 더 각광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배려와 인기의 이면에 자리한 의도, 그리고 그로 인해 영향 받는 거리에서의 삶을 생각할 때 난 구상가의 손을 들어 주고 싶다. 그 이유는 시설의 편리함도, 조명의 화려함도 아닌 여기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맛볼 수 있는 지상과의 접촉 방식에 있다.
구상가에서 대전역 광장으로 나가다보면 방사형으로 퍼지며 긴 숨을 토해내듯 크게 열린 틈을 만날 수 있다. 지붕을 덮음으로 비나 눈을 막아 좀더 안락한(?) 통로를 만들겠다는 담당자의 의지가 이곳에서 관철되지 않은 이유는 모르지만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거기엔 하늘이 있고, 별이 있고, 바람도 있다. 또 사람도 있다. 비록 다양한 행위들의 발생을 이끌어내기엔 조금은 숨가쁜 계단이지만, 이곳은 구상가의 유일한 공간이자 긴 호흡의 장소이다. 이전에 걸어온 지하상가에서 느낀 크기에 대한 감각은 한순간 예외적 크기와 형태에 마주한 우리의 걸음을 잠시 더듬거리게 만든다. 숨을 가다듬을 수 있는 멈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구상가에서 경험하던 멈춤은 존재하지 않을 듯 싶다. 중앙로를 따라 대전역을 관통하는 도로의 생성과 대전역 개발에 따라 구상가의 예전 틈은 이전 지하상가들에서 보았던 형태의 통로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비록 과거의 틈이 건축적으로 의미있는 크기와 배려를 지닌 것이 아닐지라도 지금, 여기라는 장소에 유효적절하게 놓여있고, 그로 인해 우리의 바쁜 걸음을 잠시 잡을 수 있다는데 작은 기쁨을 맛볼 수 있었는데 이젠 빛바랜 사진 속 기억으로만 자리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우리가 ‘산다’라고 말할 때 그 속에는 이미 그리고 항상 장소가 내포되어 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만큼, 그래서 그 불가분의 관계를 잊고 살아도 될 만큼 자연스런 것이라는 사실은 둘간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사실을 뒤집어 헤아릴 수 있다. 이 특별함 속에는 서로를 끊임없이 소비하며 이루어지는 무수한 생산과 소통이 수면 아래 잠긴 빙산의 그것처럼 드러나지 않는 거대함으로 자리하고 있다.
때론 서로를 보듬어 서로를 살리기도 하고, 때론 억압하다 못해 억압을 자연스러움으로 여길 만큼 상대를 무장해제 시키기도 한다. 21세기
강력한 키워드가 ‘문화’라고 할 때 산다는 것과 장소는 ‘문화’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는지. 제대로 살기 위해 제대로 된 장소를 만들어야 함은
21세기를 사는 이 땅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하는 조금은 망망한 질문을 던져본다.
글·사진|서명규 소장
건축사사무소 TAO ☎042-823-7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