乞骸骨(걸해골)
乞骸骨(걸해골)
  • 편집국
  • 승인 2006.03.0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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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해골(乞骸骨)은 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記>에 나오는 고사이다. 

중국 진나라 말기 때의 일이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어느 날 유방은 초나라를 공격했다가 항우의 반격을 받고 겨우 형양으로 도망을 쳤다. 수개월 후 군량 수송로가 끊기자 유방은 항우에게 강화를 청했다. 이에 항우는 강화하려는 마음을 먹고, 그의 충신인 범증(范增)과 상의하였다.

그러나 범증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의 반대에 부딪힌 항우는 자신의 뜻을 버리고 형양을 포위했다. 이 때 유방의 휘하에 진평이라는 지략가가 있었다. 그는 항우의 휘하에 있다가 유방에게 도망쳐온 인물이었다.

진평은 항우의 조급한 성격을 잘 알고 있어, 항우와 범증의 사이를 갈라놓을 계략을 세웠다. 그는 초나라의 군영에 부하를 잠입시켜 "범증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몰래 유방과 내통하고 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항우는 이 소문을 듣고 범증에게 부여된 모든 권력을 빼앗았다. 범증은 크게 실망하여 "천하의 대세는 정해졌으니, 왕 스스로 모든 것을 처리하십시오. 나는 해골을 초야에 묻겠습니다"하고 사직을 청하였다.

결국 항우는 진평의 책략에 넘어가 충신을 잃게 되었다.
이때부터 걸해골은 '해골을 빈다는 뜻으로, 늙은 재상(宰相)이 나이가 많아 조정에 나오지 못하게 될 때 임금에게 그만두기를 청원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정치인들이나 관리들이 자청하여 사직을 한다는 뜻으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걸해골을 청하고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한 인물들이 많았다.    
숙종 때의 학자인 김창흡과 김창협 형제는 부친이 기사환국 때 죽음을 당하자 숙종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걸해골을 청했다.

신라 말의 학자 최치원은 진성여왕 때 아찬의 벼슬을 지냈으나, 걸해골을 청하고 낙향했다. 또한 영조 때의 학자인 이집은 이인좌 등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이 있어 벼슬이 내려졌으나, 걸해골을 청하고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고 걸해골을 청했기에 큰 학문적인 업적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참으로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과연 현대의 정치인들 중에 걸해골을 청할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권력의 그늘에서 살아보겠다고 아우성들이다. 권력은 마약과 같아서 그것을 맛본 사람이 그 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나아가고 머물러야 할 시기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 길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일 것이다. 그러기에 과감하게 걸해골을 청하고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기여해 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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