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사라지는 것들…방앗간
도시에서 사라지는 것들…방앗간
  • 월간토마토 김의경
  • 승인 2011.09.2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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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곡한 원룸 틈 사이로 사라져가는 들기름 냄새의 추억

유난히 후텁지근했던 8월 어느 날, 취재 차 들렀던 선화동 골목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원체 안테나가 거꾸로 달린 길치인지라 사방을 둘러봐도 낡은 건물 미로일 뿐, 빠져나갈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골목을 돌고 돌다 우연히 맞닥뜨린 ‘선화 미곡상회와 기름집’. 3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두 가게는 주인집과 셋방처럼 나란히 붙어 있었다. 달리 보면 오누이 같기도 했다.

세월의 흔적을 훈장처럼 간직한 가게를 보니 순간 어릴 적 동네시장통 어귀에 있던 기름집이 생각났다. 그 근처만 가도 들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기 때문에 지나칠 때면 항상 ‘갓 볶은 나물 위 계란프라이를 얹고 고추장과 들기름을 넉넉히 부은 비빔밥’을 떠올리며 코 평수를 넓혔었다. 선화동 골목에서 마주친 기름집 역시 간판만 다를 뿐 머릿속 그곳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TV에서 봤던 시골장터 골목 기름집 같기도 했다. 전국 각지에 사는 할머니들이 시외버스까지 타고 찾아와 메었던 배낭을 끌러놓고 두런두런 소담을 나누는 곳. 기름이 걸쭉하게 잘 뽑히면 소주병 내지는 PET병에 담고, 또다시 메고 온 배낭에 옹골지게 담아 길을 떠나는 곳 말이다. 적어도 외관에서만큼은 충분히 그런 향수가 느껴졌다.

때마침 비가 쏟아져 맞은편 건물 처마 밑으로 숨었다. 호기심에 한참을 바라보다 주인인 듯 보이는 할아버지가 얼굴을 쓱 들이미는 바람에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다 들킨 남정네마냥 후다닥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찾은 선화 미곡상회와 기름집. 비가 올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우는 후텁지근한 날씨에 안주인은 부채질하며 바깥에 나와 앉아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일전에 글쟁이 심장을 떨어뜨릴뻔 했던 주인 할아버지는 쪽방에서 달큰한 낮잠 중이었다. 방 바깥 편으로는 분쇄기 여러 대가 덮개에 덮인 채 얌전히 손님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그 곁에 쌀 포대와 저울도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시장통 방앗간과는 달리 “떡은 잘 하지 않는다.”라는 선화 미곡상회와 기름집은 일대 식당과 동네 토박이가 주 고객이다. 추석 즈음해서 일이 몰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연휴가 끝난 다음 사람들이 고향에서 햇곡식을 가져오면서부터 분쇄기가 바빠진다.

10년 전만 해도 장사가 잘됐다고 하는데, 법원과 세무서 등 행정기관이 하나, 둘 둔산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니 골목이 텅 비었다. 조만간 충남 도청마저 내포시로 이전하면 어떻게 될지 가슴 한편이 답답하다.

“예전엔 밤이나 낮이나 멀리 아파트까지 배달 나가고 정말 열성적으로 일했지. 지금은 나이도 많아 슬슬 놀며 한다는 생각으로 해. 도청까지 이사 가고 나면, 글쎄 그땐 상황을 봐야겠지.”

낡은 건물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원룸이 들어섰을 땐 사람이 늘겠거니 기대를 걸기도 했지만, 젊은 사람이 주로 사는 원룸에서 방앗간을 찾는 일은 거의 드물다.

“저 사람들은 다 바깥에서 사 먹어. 쌀 한 되도 안 팔아가니까.”

그래도 유서 깊은 식당에서 이 빠진 찻잔과 그릇을 자랑스레 내놓듯 가게와 함께 청춘을 보낸 안주인의 표정에선 자부심이 묻어난다.

“우리가 예전 주인한테 방앗간을 건네받은 것도 벌써 30년이니까 엄청 오래된 거지. 그전부터도 이 자리는 계속 방앗간이었다고 그래. 겉으론 낡고 허름해 보이지만 기계도 깔끔하게 써서 새 거 같아. 이 방앗간으로 자식 넷 다 공부시키고 시집장가도 보냈어.”

얼굴 나오는 게 싫다며 렌즈에서 한참을 비켜 서 있던 안주인이 “기름 짜는 덴 안 찍어가?”라며 가게 문을 열어줬다. 방앗간보다 훨씬 단출한 공간은 유압기를 고무호스로 연결한 기계로 들어찼다. 문지방을 넘어서니 예의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코를 찌른다. 신기한 듯 이것저것 묻는 글쟁이에게 시큰둥하게 “원래 그런 것”이라면서도 기름이 나오는 원리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해준다.

취재를 마치고 나서 인사를 하며 돌아서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땅에서는 지열과 함께 흙냄새가 올라온다. 아이러니하게도 요맘때만 되면 엄마가 방앗간에서 쪄오는 증편, 일명 ‘기정떡(술떡이라고도 함)’ 생각이 났다. 무명천을 걷어내면 ‘훅’하고 끼치는 김, 막걸리 냄새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운 게 생기는 걸 보니 벌써 추석이 가까워져 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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