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돼 지 골 혹 은 동 이 골
‘도니’라는 독특한 마을 이름 유래를 주민에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자료에는 남아 있다. 두 가지 유래가 있다. 하나는 순천 박씨 집안에 그 기원을 두고 하나는 이 마을에 있었다는 샘과 관련 있다. 둘 모두 발음을 통해 유추한다. 도니를 한자로 표기하면 돈리(敦里)다. 이 마을이 처음 생길 때 순천 박씨가 돼지골에서 출생, 혹은 묘를 써서 붙은 이름이란다.
그래서 돈리(豚里)가 본래 이름이란다. 그렇다면, 묘를 썼다는 그 돼지골은 바로 현재의 도니마을인 셈이다. 마을 주민 김태립 씨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명 순천 박씨와 연관은 있다. “조상 묘도 저쪽 산에 있고, 매년 시제를 지낼 때는 저 이사동 지나서 있는 금동 마을에 사는 순천 박씨 어른을 비롯해 후손들이 찾아와서 제를 올려요”

두 번째 설은 차가운 물이 나오던 샘과 관련 있다. 좀 더 삶과 밀접한 유래며 해설에 있어서도 완결미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는 차가운 물이 솟는 샘이 있었다. 그래서 동네 아낙들이 물을 길러 많이 오갔다고 한다. 당연히 머리에 동이를 이고 다녔을 게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동이골’이라 불렀다. 그랬던 것이 발음과 한자 표기상 돈이(敦里)로 적었다는 얘기다.
근데 왜 하필 도타울 돈자를 썼는지는 역시 모르겠다. 하긴, 많은 전통마을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으며 뜻보다는 그 음에 맞는 한자를 가져다 쓴 사례가 많으니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농 지 는 공 장 지 대 로 변 화
마을이름에 ‘골’이 들어갔으니, 마을 옆에 산자락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참 야트막하다. 멀리 지푸재 고개 쪽으로 높은 산이 보이기도 하지만 마을 주변 산은 낮다. 그중 마을이 더 바짝 기댄 왼쪽 산은 아예 택지로 개발해 산이라기보다는 그냥 언덕정도로 보인다.
도니마을은 그 안쪽에서 시작했을 게다. 대전천과 가까운 곳은 농지가 주를 이루었을 터다. 넓고 평평하며 물을 대기 쉬운 곳에는 농지가 그 안쪽 골짜기와 접해 땔감을 구하기 쉬운 곳에는 마을이 들어서는 것이 일반적이니 이런 추론에 큰 무리는 없을 게다.
마을에 들어서 대전천 쪽으로 보이는 산을 안산이라 불렀고 그 너머 백운이나 중심이 쪽에 농지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매립해 평평한 터를 만들어 공장이 주로 들어섰지만 말이다.
마을이 기댄 언덕에는 집 몇 채가 남아 있다. 마을초입에서 만난 한 주민은 그 언덕에 집을 짓고 사는 김태립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라 조언했다. 잘 손질 해 둔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니 말집 형태의 집 두 채가 나란히 서 있고 다리가 짧고 머리가 큰 개가 꼬리를 흔든다.
김 씨 할아버지가 지금 자리에 터를 잡은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만 해도 마을 진입로는 손수레가 드나들기도 벅찰만큼 좁은 논두렁길이었다. 지금도 길 아래로는 도랑이 흐른다. 도랑을 복개해 마을 길을 넓혔지만, 여전히 차 두 대가 겹쳐 지나기는 어려울 정도다.
언덕에 올라 처음 만나는 집이 할아버지가 이사할 때 지은 집이고 그 옆에 집은 이 언덕에 있던 교회 목사 사택이었다. 할아버지가 땅을 내 줘 사택을 지은 것이 1970년대 중반 일이다. 지금 그 교회는 더 크게 지어 산 아래로 내려갔다.
“원래 이 야트막한 산이 임씨들 종산이었어요. 그것을 어떤 이가 구입해 택지로 형질변경한 후 판매해 지금처럼 집이 들어선 것이지요.” 이 산을 동네 사람들은 그냥 뒷산이라 불렀다.

도니마을 집은 마을만큼이나 오래 묵었다. 보기 싫게 무너지는 빈집도 있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무척 정갈하다. 주택은 사람 입김으로 유지한다는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 와 닿는다. 아이 달래듯 끊임없이 교감하며 손길을 준 흔적이 곳곳에 배어난다.

언덕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만난 송석하(80) 할아버지도 좁은 오솔길에 앉아 함석판을 구부리고 있었다. 처마 어딘가에 매달 물받이를 만드는 모양이다. 할아버지 집은 그 언덕 경사면 아래에 있어 오솔길에서 지붕을 내려다본다. 송석하 할아버지 집 뒤 언덕 풍경이 묘하다.
인류가 멸망한 후 남아 있을 풍경 같기도 하고 현대 문명을 개탄하며 ‘허무’를 표현하는 인상주의 화가 작품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며 한참을 서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선방처럼 말이다.
한때 콘크리트 벽돌로 만든 시설물이 있었음을 상상하게 하는 구조물이 흙속에 파묻혀 남아 있다. 흙 밑에 묻힌 벽돌이 마치 성벽을 연상케 한다. 집은 없어지고 벽체 일부와 판판한 터만 남은 그 모습도 인상적이다. 무엇인가를 치유하는 행위처럼 그 공간에 햇볕이 한가득 이다.
“옛날에 집도 있고 닭 키우는 시설도 있었지. 지금은 다 떠났지만. 내 땅도 좀 있었는데, 팔았어. 주인이 미국에 가서 그냥 내가 일구고 있어.” 송석하 할아버지는 삶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그 언덕에 작은 쉼터를 만들고 온실을 시공했다. 땅에 그냥 맥없이 풀이 자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땅에 의지해 삶을 일궜던 이들에겐 고역이다.

“지금 우리가 겉모습만 사람이지, 사람 사는 게 아니여. 오늘 아침에도 이명박 씨가 나와서 연설을 하더구만, 맨 경제 얘기만 하더라고. 결국, 돈 얘기인데 그렇게 돈만 좇으니 세상이 이상해지지. 이 동네도 고속도로가 지나가기 전에는 사람 사는 동네 같았어. 안대별 백운이 사람들하고 죄다 모여서 저녁이면 술도 먹고 싸움도 하고 화해도 하고…. 사람 사는 것 같았지. 그냥 삼시세끼 밥 먹고 앉아 있는 거야. 이게 사람 사는 건가?”
도니마을 송석하 할아버지는 가슴 속 응어리가 많았던 모양이다. 낯선 젊은이를 만나 한바탕 풀어놓고는 셔츠 앞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냈다. 어떤 철학자가 논리적으로 풀어낸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보다 훨씬 깊게 다가오는 이야기였다. 직접 살아낸 삶에 관한 이야기니 당연하다.
할아버지가 앉아 있는 오솔길에서 언덕 등성이를 따라 길게 늘어선 밤나무가 보인다. 할아버지가 직접 심은 밤나무다. 땅과 함께 새주인을 만났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곁에 있다. 할아버지와 헤어져 오솔길을 따라 좀 더 걸어가면 대나무 숲이 있다. 외할머니댁 뒤뜰에 있던 그 파란색 대나무다. 바람에 흔들리며 사그락 거리는 소리는 자동차 소음에 묻혀 음울하다. 막다른 길. 고속도로 아래로 터널이 보인다. 마을을 조각낸 후 만들어 놓은 얄팍한 호의다.
도니마을은 더는 산자락에 기댄 마을이 아니었다. 땔감과 나물, 맑은 공기를 주던 산 대신 소음과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가 거칠 것 없이 질주하는 고속도로에 기대 조금씩 거친 숨을 내쉬는 마을이다. 송석하 할아버지가 건네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