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천 판잣집 복원을 허하라’
‘대전천 판잣집 복원을 허하라’
  • 글 이용원
  • 승인 2013.06.14 1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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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토마토 상상

대전천 주변에 ‘판잣집’을 복원하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불에 탄 숭례문을 복원하는 시대니, 못 할 말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도 처음부터 그 주장에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복원이라면, 숭례문처럼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에나 적용할 얘기고 그 역사적 가치라는 건 권력이든 재력이든 무엇 하나와는 연관한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구질구질한 판잣집이 무에 그리 자랑할 일이라고.’라는 마음도 저 깊은 곳에 있고 말이다.

“대전은 근대도시잖아. 일제강점기에 만들었다가 한국전쟁 때 글자 그대로 초토화되고 그즈음에 판잣집이 들어섰지. 판잣집이 길게 늘어섰던 그 풍경은 우리 아픈 근대를 제대로 보여주는 역사적 장면이라니까. 판잣집을 다만 몇 십미터 구간이라도 복원하고 그곳에 젊은 작가가 들어와 예술품도 팔고 공예품도 팔고 그러면 좋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보러 올 텐데.”

그런데, 육십을 훌쩍 넘긴 소설가가 풀어놓는 이야기가 점점 솔깃하다. 창조적인 건축가 도움을 받아 외형을 최대한 복원하되 창조성을 곁들인다면 그 자체로 작품이겠다. 그곳에 작은 카페도 들어서고 공예품이나 예술작품 등을 판매하는 곳이 들어선다면, 젊은 디자이너가 선보이는 옷과 구두 등을 판매하는 곳이 모인다면 무척 흥미로운 공간이 될 수 있겠다.
1950~1960년대 물품을 집중적으로 판매하는 골동품점이 들어서고 현대인 입맛에 맞게 재해석한 꿀꿀이죽이나 왕빵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음식점도 괜찮다. 몇 채 정도는 판잣집이 그곳에 형성되었던 근대를 기술하고 보여주는 공간으로 삼아도 좋겠다. 아예 한 채는 그 시절 판잣집 내부를 고스란히 복원해 보고. 전시공간으로 한 채 정도를 확보해 갤러리로 쓸 수도 있다. 한 채는 회의공간으로 만들면 활용도가 높겠다.

바로 앞이 중앙시장이니 더 다양한 계층의 시민이 시장을 찾도록 만드는 매개 구실을 할 수도 있겠다. 좀 저렴한 비용에 임대하면 임차인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조건이 맞다면 월간 토마토도 한 칸 임대해 대전역과 그 주변을 기록하는 작업을 벌이고 싶다. 그 결과를 토마토에도 싣고 전시공간에 전시도 해보면 재미있겠다.

물론, 복원해야 할 곳이 대전천 제방구간이다. 현재 도로로 사용하고 있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과제고 판잣집 주재료가 글자 그대로 나무여서 화재 등 안전사고와 보안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대 기술과 시스템으로 해결점을 못 찾을 일도 아니다.

아예, 태양광이나 태양열, 풍력, 수력도 적극 활용하면서 이 섹터에서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면 더 큰 의미가 있겠다. ‘과거에서 미래를 찾는다.’라는 구호도 외치면서 말이다.

<대전천 둑에 하꼬방들이 너덜너덜 기워진 헝겊처럼 들어서기 시작했다. 처음에 중교에서 한 채 한 채 들어서던 하꼬방은 첫집이 두꺼비집처럼 웅크리고 세워진 지 석 달도 못 되어서 무려 백 미터도 넘는 일렬종대로 변했다. 하꼬방들의 모습은 오뉘처럼 닮아 있었다.> -달바라기 중-

‘달바라기’는 대전에서 작품 활동 중인 김수남 작가 대표작이다. 1980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소설과 김수남 작가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당시 판잣집은 한 평이 채 안 되었다. 그냥 사각틀만 갖췄지 부엌이나 화장실 등 부속시설은 아예 없었다. 방이 비좁아 사방에 빙 둘러 실강(시렁)을 만들어 매달았다. 그 위에 이불과 세간살이를 전부 올려두었다. 지붕도 당연히 판자로 올리고 양철 조각을 주워다 기워댔다. 그러니 비라도 한 번 내리면 천정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져 그릇이라는 그릇은 모두 모아 방바닥에 늘어놓아야 했다. 난방을 하려면 구들장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런 호사를 누릴 수도 없었다. 그냥 넉넉하지 않은 요를 가로로 깔아 등만 간신히 올리고 누웠다.

혹시 방이 두 개 필요하면 넓은 치마나 천을 가져다가 걸어 두는 것이 전부였다. 판자로 사방을 둘러친 벽은 벽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여서 옆집에서 나는 소리가 전부 들렸다. 비밀이랄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공동체’였다.

“당시 밖에 나갔다가 들어올 때는 꼭 판자 쪼가리라도 주워왔어. 벽이든 지붕이든 조금이라도 더 기워야 비나 바람을 막을 수 있으니까. 골목을 헤집고 다니면 담장 중에 판자로 만든 담장이 있었는데 조금 부실해 보이는 것을 발로 툭 차면 떨어졌다고. 그럼 그걸 주워서 얼른 집에 오는 거지.”

그렇게 무엇이라도 하나 주워들고 오는 자식은 ‘사철하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온 가족이 이렇게 주워 모은 갖가지 재료로 판잣집을 덧대 조금씩 비와 바람을 막았지만 집이 갖춰야 할 기본 기능을 충족하기엔 한참 부족했다. *대전시에서 발행한 <대전근대사연구초2>에 실린 내용 중 일부 재인용

이 제안을 맨 처음 한 소설가 김수남 작가는 대전이 갖는 ‘근대성’에 주목했다. 목척교를 복원한다는 반가운 소식에 한껏 기대했으나 나온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했고 으능정이에 뜬금없이 들어선 LED 시설물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1950~1960년대 대전천 제방에 들어섰던 판잣집을 복원하자는 주장이 좀 극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한국전쟁 즈음에 벌어진 대전이 온통 폐허로 변하고 그 속에 민중이 치열하게 삶을 이어갔던 상징적 공간으로서 판잣집은 의미를 지닌다.

‘달동네 박물관’을 지어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중한 추억조차 상품으로 만들어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팔아먹는 일이라고 비난할 지도 모르겠으나, 그리 볼 일은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돌아보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역사 중 잃어버린 대목을 최소한으로 되살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가까운 역사는 우리가 잃어버린 지도 모르고 지나쳐 가고 있는 어떤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주는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옛 충남도청이 1930년대 전후반을 소제동이 그보다 좀 더 앞선 시대를, 판잣집을 복원해 중앙시장과 함께 한국전쟁 시기 주변을, 테미도서관을 중심으로 관사촌과 엮어 1970년대 이후를 기록하고, 그 사이 사이에 의미 있는 공간과 건축물을 배치해 부족한 부분을 메우면서 각 지점을 연결한다면 대전 근대역사를 아우르는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겠다. ‘판자촌 복원 포럼’이라도 만들어 보아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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