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새아침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망한다. 물질적인 부분도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지금 보다 더 나은 상황을 그려보고 다짐한다.

물질적인 부분은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부(富)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부분으로의 확장을 포함할 수 도 있다. 반면에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좀 더 건강하게 영위하기 위한 방법으로 운동을, 다이어트를, 그리고 내적 성장을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러한 것들을 소유하고 영위하기 위해 버리고 포기하기 까지 한다. 그러나 이 많은 것들을 하루아침에 버린다고 해서 포기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물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점차로 내 몸에 적용해보고 자신의 상황에 대한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 필요하다.
결국 자신의 언행 그리고 실천에 대한 성공을 위해 노력하기 위한 내용이 손자병법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손무(孫武)는 전쟁에서의 상황에서 승리하기 위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지승유오(知勝有五) 지가이여전(知可以與戰), 불가이여전자승(不可以與戰者勝), 식중과지용자승(識衆寡之用者勝),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 이우대불우자승(以虞待不虞者勝), 장능이군불어자승(將能而君不御者勝) 차오자 지승지도야(此五者 知勝之道也). 자신이 계획한 내용들이 혹은 추진 중인 전략들에 대한 승리를 위한 판단(지승유오, 知勝有五)이 중요하다.
너무 무리한 계획은 오히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전략을 통해 피해를 줄 수 있다. 즉 싸우려는 상대에 대한 파악이 중요하다. 자신을 먼저 알고 실행할 수 있는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기간에 경제적 성장을 도모하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통해 단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다른 내용으로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의 리더십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그동안 관대한 자세를 버리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불치병이 생기게 된다.
그런 상황을 주변에서 나무라고 탓하는 모습이 당사자들을 곤욕스럽게 한다. 그런 상황이 자주 반복될수록 자신에 대한 명예적 태도나 자존감이 떨어지게 된다.
주변의 응원이 도움이 될 수 있어도 오히려 비난과 탓은 어려움을 만들게 된다. 이것이 나와 주변사람들이 가지는 공통된 마음으로 바라보고 응원해주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혼자 독단적으로 무리하게 실행하는 것보다 주변의 응원도 귀담아 듣고 같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논어(論語)에서도 이러한 점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선의인(鮮矣仁). 말을 듣기 좋게 꾸미고, 얼굴표정을 꾸미는 사람은 어진경우가 드물다라는 말이다. 열심히 세운 계획을 주변에서 돌봐주지 않고 방관하면서 밤놔라 대추놔라하는 식의 표현과 무조건 잘한다고 봐주는 것은 진정성이 없는 태도이다.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진정성문제이다. 기업이 고객을 대하는 태도역시 진정성이 필요하다. 고객의 지갑에 대해서만 예의를 갖추고 반긴다면 이것이야말로 교언영색이 아닐는지. 또한 상점이나 기업에게 절대적으로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발생한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오래된 캠페인을 맹신하여 흔히 이야기하는 갑질을 하는 고객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우리나라처럼 상점 혹은 기업의 직원들을 격하시켜 바라보는 곳이 없는 것 같다.
주인과 손님의 평등관계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현실인 듯 보인다. 기업은 고객의 지갑에 고객은 기업을 아래세상 바라보듯 하는 태도는 결국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불필요한 태도이다.
쌍방의 교연영색은 진정성 없는 사회를 만드는 일등 공신이 된다. 그리고 너무 자신을 낮추는 것도 좋지 않다. 서로 존경이 없는 상태에서 자세를 낮추게 되면 불안한 마음마저 들게 된다.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생존에 대한 강력한 의지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복종과 규율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폭력적인 성향이 생기게 된다.
고객은 대접을 받기 위해 우월성을 드러내고 기업은 자신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타사에 비해 우수한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보이는 눈속임들이 결국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사회를 만들게 된다.
이는 교언영색을 통해 어디선가 자신보다 약한 집단을 짓밟고 서는 어질지 못한 태도가 된다. 교언영색으로 수익을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기업은 고객과의 공감능력을 상실하고 개인적으로 보면 대인관계를 상실하는 지름길이 된다. 이를 잘 조절하고 대응할 줄 아는 리더가 결국 시장에서의 리더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가지기위해 마음으로 다짐하고 노력하는 요즘이다. 결국 소유에 대한 내용이다. 가지려는 마음은 결국 안전을 추구하고자하는 욕구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다.
어제보다 작년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기도까지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는 자신의 안전이 위협을 받고 있을수록 그 소유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비단 물질적인 부분이 되었던 간에 정신적인 부분이 되었던 간에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소유에 대한 욕구는 지속적으로 증대한다는 것이다. 그 중심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소유에 관해서는 대학(大學)에 인자(仁者)는 이재발신(以財發身) 불인자(不仁者)는 이신발재(以身發財)라고 하고 있다.
이는 어진 사람은 재물로써 내 몸을 일으키지만, 어질지 못한 사람은 몸으로써 재물을 일으킨다라는 말이다. 물질적 혹은 다른 부분으로 풍요롭게 추구하기 위한 우리의 욕구는 지속되어왔다.
그러한 욕구는 결국 우리의 풍요와 행복이라는 명제를 위한 기존 전제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본질적인 욕구에 의한 인간 본연의 모습이 세대를 초월해서 물질적 접근이 비인간화 혹은 인간 소외라는 발원지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욕구는 자신을 화려한 문명 속에 갇혀 그 외경심과 인간성을 배제함으로써 인간이 지닌 본연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게 되는 것이다.
더 많이를 추구하는 인간의 기본 욕구는 기업에게도 고스란히 나타나게 된다. 매년 상승하기 위한 수익을 추구하는 탓에 삭막해지고 몰인간적인 기업환경으로 전락하고 있다.
체움으로써의 욕구가 아니라 서로 나누고 함께하려는 마음이 요즘은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싶다.
경쟁의 패러다임에서 공유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우리가 그동안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잃어버렸던 인간 본연의 태도를 회복하고자 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오염된 우리들의 묶은 때를 이제는 이재발신(以財發身)의 정신으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를 위한 기본적 태도이자 우리 자신들의 가치를 복원하고자하는 기본적인 내용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우리의 경주 최부자가 그랬고 사양에서는 로마귀족들의 솔선수범이라 일컫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철학이 바로 그 소유에 대한 균형을 유지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인 실천 철학이다.
소유하고자하면서 생기는 또 하나의 태도는 자신의 의식구조가 방어적이고 부정적으로 변질이 된다. 더 가지기 위해 경쟁의 모드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그 태도인 것이다.
이는 경쟁이라는 새로운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 경쟁이 정당하고 공정하다면 해볼만한 것이겠지만 경쟁의 순수성을 찾기 위한 또 다른 노력을 기울여야한다는 것이다.
소유에서 발원해서 경쟁에 이르는 우리의 삶에서 균형 잡을 수 있는 힘을 키워야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이러한 것이 인간 본연의 가치를 스스로 추락시킬 뿐 아니라 최근에는 경쟁논리를 내세워 우리를 물질적 척도로 평가하는 몰인정을 제도적으로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그 옛날 공자도 이를 고민한 듯 싶다. 논어 이인(理仁) 편에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소인유어리(小人喩於利)이라 하여 바른 마음을 강조하였다.
군자는 사람을 대할 때나 일을 처리할 때 늘 올바름을 기준으로 삼지만, 소인은 자신의 이익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의 본능적인 심성으로 보면 군자는 바름(義)을 추구하므로 소유에 대한 욕심을 멀리할 수 있지만 소인은 작은 이익에도 욕심을 탐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군자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기업의 입장에서는 시장(市場)이라는 전장(傳掌) 속에서 균형있는 마음을 통해 밝은 사회 그리고 같이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