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뉴스 이성현 기자] 꿈의 에너지 기술로 불리는 ‘초전도’ 현상이 시작되기 직전 물질 내부의 전자들이 마치 군대처럼 미리 정렬해 특정 방향으로 순환하는 ‘숨은 질서’를 만든다는 사실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세계 최초로 규명됐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물리학과 김용관·한명준·이성빈 교수 공동연구팀이 차세대 양자물질인 카고메 금속(CsV₃Sb₅)에서 초전도가 나타나기 전 전자들이 스스로 형성하는 고유한 구조인 ‘고리전류 질서’를 실험과 이론을 통해 증명했다고 30일 밝혔다.
초전도는 전기가 저항 없이 흐르고 에너지 손실이 거의 없어 양자컴퓨터, 자기부상열차, 고효율 전력망 등의 핵심 기반 기술이다. 그러나 전자들이 정확히 어떤 빌드업 과정을 거쳐 저항 0의 상태에 도달하는지는 수십 년간 현대 물리학의 미스터리였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초전도가 나타나기 전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 원래 상태와 달라지는 현상인 ‘시간반전대칭성 깨짐’의 흔적이 관측돼 치열한 논쟁이 이어져 왔다. 이것이 전자들이 규칙적인 무늬를 만드는 ‘전하밀도파’의 단순한 부산물인지 아니면 그보다 먼저 존재하는 독자적인 숨은 질서인지 불명확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일본 전통 바구니 문양의 삼각형 원자 구조를 지닌 ‘카고메 금속’을 활용해 이 수수께끼를 풀었다. 연구팀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첨단 ‘원편광-각분해광전자분광’ 기술을 도입했다.
이는 물질에 왼쪽으로 도는 빛과 오른쪽으로 도는 빛을 번갈아 비춘 뒤 튕겨 나오는 광전자의 세기 차이를 정밀 측정하는 방식으로 장비 자체의 기하학적 오류나 표면 결함으로 발생하는 가짜 신호를 완벽히 제거하고 물질 고유의 양자역학적 신호만을 골라낼 수있다.
실험 결과 전자들이 규칙적인 무늬를 이루는 전하밀도파 형성 온도인 약 94K(영하 179℃)보다 훨씬 높은 약 140~145K(영하 133℃) 구간에서 이미 전자들의 움직임에 특정한 방향성이 발생함을 포착했다.
이는 전자가 고전적인 입자처럼 실제로 뱅글뱅글 도는 것이 아니라, 원자 사이를 이동하는 양자역학적 과정에서 일정한 위상 차이가 생겨 미세한 궤도 자력과 방향성을 갖게 됨을 뜻한다.
즉 초전도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전자들이 이미 ‘고리전류 질서’라는 숨은 준비 과정을 거치고 있었음을 밝혀낸 것이다.
이번 연구를 통해 규명된 카고메 금속의 온도별 전자 상태 변화는 고리전류 질서 형성 단계에서 전하밀도파 진입 단계를 거쳐 최종 초전도 상태에 도달하는 정밀한 계층 구조를 따른다. 고리전류 질서 상태에서 먼저 시간반전대칭성이 깨진 후, 전하밀도파가 형성되며 양자 상태가 복합적으로 얽히고, 마지막 극저온에서 초전도가 발현되는 순서다.
이 순서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저온에서 결성되는 초전도 유도 쌍(쿠퍼쌍)은 아무런 규칙이 없는 백지상태의 금속이 아니라 이미 시간반전대칭성이 깨지고 비대칭적인 방향성이 확립된 고리전류 환경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향후 초전도 이론은 이 선행 질서를 반드시 고려하여 재정립돼야 한다도 했다.
특히 이 고리전류 질서는 물리학계의 해묵은 숙제인 ‘구리산화물 고온초전도체’의 유사갭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에 제안됐으나 그동안 실험적 증명이 극히 어려웠던 모델이다. 이번 발견으로 고리전류 질서가 특정 물질만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강상관 양자 물질 전반에 흐르는 보편적인 전자 질서임이 명백해졌다.
김용관 교수는 "초전도가 나타나기 전 전자들이 어떤 순서와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며 숨은 질서를 구축하는지 인류 최초로 시각화해 보여준 연구"라며 "초전도 발생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고 향후 더 높은 온도에서 작동하는 비전통적 신초전도 물질을 설계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명준 교수도 "연구팀이 도출한 방대한 실험 데이터가 양자역학적 이론 계산을 통해 예측한 전자의 미세 궤도 움직임과 소수점 단위까지 정확히 일치했다"며 "실험과 이론의 유기적 융합이 숨어 있던 전자의 질서를 세상 밖으로 끌어올린 핵심 동력"이라고 강조했다.
이성빈 교수 역시 "고리전류 질서와 전하밀도파가 별개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고도의 복합 양자 상태를 만든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향후 이 상전이 계층 구조를 인위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최적의 맞춤형 초전도 상태를 양자 소자 내에 직접 설계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