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토마토] 중앙시장 열쇠집, 정봉래 씨를 만나다
[월간토마토] 중앙시장 열쇠집, 정봉래 씨를 만나다
  • 이수연 기자
  • 승인 2015.11.26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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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던 때는 지나고, 매일 비슷한 시간이 흐른다

비틀거리던 때는 지나고, 매일 비슷한 시간이 흐른다

오전 7시 40분 문을 열고 오후 5시 문을 닫는다. 열쇠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점점 줄면서 열쇠를 복사하거나 새로 만들러 오는 사람도 점점 준다. 한 평 남짓한 컨테이너 앞에 바글바글 손님이 몰리던 때도 있었지만, 하루에 네댓 명 정도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꾸벅꾸벅, 시간은 잘도 간다

아직 따뜻한 가을 햇볕에 고개를 맡긴다. 오후 햇볕에 쏟아지는 졸음에 꾸벅꾸벅 시계추처럼 머리를 끄덕인다. 새벽 4시면 눈을 떠 전동휠체어를 타고 인동에서 중앙시장으로 넘어온다. 4~5년 전만 해도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길이다. 지금은 허리 밑으로 마비가 와서 걷기조차 힘들어졌다. 휠체어 타고 다니는 길이 멀게도 가깝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매일같이 다니는 길이고, 몇십 년을 다니던 길일 뿐이다.

▲ 중앙시장 정봉래 씨
중앙시장에서 열쇠 집을 하기 시작한 것은 60년 가까이 됐다. 처음에는 노점이었다. 골목길 한편에 자리를 펴고 시작하다가 지금 이 컨테이너라도 온 게 50년 정도다. 6•25전쟁 이후 열쇠를 배웠다. 원래는 가방 만드는 걸 배워서 가방 만드는 일을 하려고 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가방 집에서 지퍼, 가죽 다루는 것 등을 배웠다. 덜컥 6•25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말도 못하게 뒤숭숭하게 지나갔다. 대전역 근처에 있다가 눈앞에서 떨어지는 폭탄을 목격했다. 흙이 온몸을 뒤덮었다. 몸이 뜨끔뜨끔했다. 요즘 허리 아픈 게 그때 후유증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하 수상한 시절이었다. 서민들에겐 먹는 게 가장 큰 전쟁이었다. 썩은 고구마로 겨울을 나던 시절 때문에 지금도 고구마는 먹지 않는다. 형제가 열두 남매 있었다. 그중 셋만 남았다. 배 곯다 죽은 이도 있고, 먹고 살려고 누군가 따라간 이도 있고, 아파서 죽은 이도 있고, 다양한 이유로 세상을 떠나고 곁을 떠났다. 누구의 죽음보다도 어머니의 죽음이 아직도 가슴에 멍울로 남았다. 가여운 어머니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시절이 그랬다. 먹고 사는 것 말고는 생각할 겨를도 틈도 없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었다.

▲ 중앙시장 정봉래 씨
열여덟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스무 살 무렵 결혼을 했다. 그렇게 일찍 결혼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싫다고 도망 다니던 걸 사촌 형이 잡아끌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만 해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맏아들이 환갑이 넘었다. 삼 형제를 뒀다. 자식을 낳으니 또 먹고 살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생각할 겨를도 무언가 할 겨를도 없었다

돈벌이만 된다면 뭐든 했다. 그러다 열쇠를 제대로 한 게 60년 가까이다. 누군가에게 배운 건 아니다. 손재주가 좋아서 뭐든 만드는 걸 잘했다. 열쇠 하는 사람들 옆에서 곁눈질로 배우고, 자리 깔고 앉아 직접 부딪혔다. 열쇠 깎는 기술은 지금도 많이 변하진 않았다. 사람들이 열쇠를 가지고 오면 모양을 보고 가격을 부른다. 홈을 파야 하는 것도 있고, 비슷한 모양으로 깎으면 되는 것도 있다. 열쇠 복제기에 넣고 모양을 맞춘다. 홈을 팔 곳에 쇳덩이를 데고 복제기로 누른다.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다. 요즘은 다리가 불편해서 말썽이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전동휠체어를 탈 수도 없으니 다리를 주욱 바닥에 끌며 다닌다.

열쇠 하면 대전에서는 제일 가는 기술자라고 자부한다. 옛날에는 경찰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문 좀 열어달라고 데리고 가곤 했다.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처지이니 경찰들 부탁을 안 들어줄 수 없었다. 문 열리지 않는다는 신고 오면 바로 갔다. 방에 갇힌 아이를 구출했던 일, 장롱 안을 잠그고 자살한 사람의 시체를 꺼냈던 일,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별일이 다 있었다. 정보부, 보안대, 경찰서에서 하루가 멀다고 찾아 왔다. 그것도 90년대까지였다. 점점 열쇠는 사양산업으로 접어들었다. 그때부터는 열쇠만 하던 것을 가방도 함께 판매하기 시작했다.

▲ 중앙시장 정봉래 씨 열쇠 집
원래 하나만 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요즘 세상이 그렇지 않나. 그래도 열쇠 집 하면서 아들 셋 모두 대학도 보내고 대학원도 보냈다. 아이들 아파트 사는 데 보탬이 되기도 했다. 1994년도쯤에 막내아들 아파트 살 때만 해도 지금처럼 몇억씩 들 때가 아니었다. 그게 뿌듯함인가. 뿌듯함이라면 뿌듯함이겠지.

참 어려운 세상이었다

세월이 그렇다. 50년, 60년이 언제 이렇게 갔는지 모르겠다. 일에 질리지 않는 사람이 어딨나. 하기 싫을 때도 물론 있었다. 그냥 계속했던 거지. 지금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 벌써 여든다섯이다. 어릴 때는 배우고 싶었다. 학교도 더 가고 싶고, 공부도 더 하고 싶었다. 내가 못 배운 게 한이 돼서 아들들은 어떻게든 많이 가르치려고 했다. 아들 잘 키운 거? 그게 행복이라면 행복이겠지.

글쎄. 이제 와서 다른 일 하고 싶었던 게 뭐 있었을까. 생각할 필요 없다. 행복한 순간, 이런 거 없었다. 그냥 사는 게 힘들었다. 지난날 힘들었던 건 떠올리기도 싫을 때가 많다. 배고픈 거,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한다는 거 말고는 생각할 것도 기억할 것도 없었다.

우리 내외는 인동에 산다. 인동에 이사한 것도 1968년도 정도였다. 지금은 재개발한다고 해서 여남은 집 정도만 남았다. 지금은 동네 사람들 하나도 모른다. 재미있는 거 없다. 철거한 데는 사람들 다 떠났다. 아파트로 간다는 사람이 많더라.

옛날에는 술도 담배도 즐겼다. 지금은 모두 끊었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휘청거리며 자식들 보기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살던 시절은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살아야겠다는 것 말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어머니가 생각할수록 안타깝다. 좋은 거 하나도 못 보고 고생만 하다 갔다. 어머니처럼 불쌍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다.

몇 년 전에 강원도 추풍령에 500평 정도 땅을 샀다. 어머니, 아버지를 화장하고 거기에 모셨다. 어머니 묘만 다섯 번을 옮겼다. 추풍령에 모시고 나서는 마음이 흐뭇하다. 다리가 불편해 자주는 못 간다. 나도 죽으면 화장해서 거기로 가고 싶다. 얼른 할머니도 자식도 모르게, 아프지 말고 떠나고 싶다. 자다가 편안하게 갔으면 좋겠다. 어려웠던 이야기는 하려면 끝이 없다. 이제 그만 이야기하고 싶다. (고개를 살짝 들고 바로 앞 중앙주차장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며) 참 살기 힘든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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