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같은 배우 되고 싶다”
“물 같은 배우 되고 싶다”
  • 이덕희 기자
  • 승인 2005.09.0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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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연극제 최우수연기상 수상 이영숙 씨

전국연극제 최고의 배우에게 수여되는 최우수연기상. 지난 6월 10일 시상식에서 수상자가 발표되자 그 주인공   이영숙 씨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본인의 수상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 담는 그릇에 따라 변화하는 물과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배우 이영숙. 연극제가 끝난 후의 열기가 아직 남아있던 예술의 전당에서 그녀를 만났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최근 예술의 전당 앙상블홀에 올려졌던 ‘꽃마차는 달려간다’라는 작품이다. 전통적 방식으로 관을 제작하는 장의사(이종국 분)와 그녀의 딸 선주의 가족애와 인생 그리고 죽음….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무대를 명랑하게 만든 것은 조연인 ‘미스 문’이었다. 다방 여종업원으로 등장해 콧소리 섞인 트롯가요를 부르던 그녀. 겉으로는 발랄하지만 나름의 아픔을 가진 미스 문을 연기하기란 쉽지 않았다고 배우 이영숙은 말한다.

“이전 공연에서는 장의사의 딸인 선주 역할을 맡았었어요. 이번엔 제가 미스 문 역할을 하겠다고 자청했죠. 다른 모습을 연기하고 싶었고, 사실 조연이라 가볍게 여기기도 했구요. 하지만 쉬운 배역은 없더라구요. 극중 미스 문에게 미안할 정도로 아쉬움이 남는 걸요.”

사실 11년간 대전에서 연극인으로 활동하면서 그녀에게는 운이 좋다 싶을 정도로 주연 역할이 주어졌다. 10여년 전 첫 작품인 ‘나비처럼 자유롭게’에서부터 주연을 맡았고, 이후의 작품에서도 이영숙은 비중있는 역할을 연기해 왔다.

그러나 자신의 연기에 대해서만큼은 절대 자만하지 않는다. 일부러 작은 배역,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려고 도전하는 배우 이영숙.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대전 연극인이다. 이번 전국연극제에서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그녀에게 유난히 큰 박수갈채가 쏟아진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정말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쉬지 않고 일년에 서너편 이상은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사실 배우 제대로 하려면 서울에 가라는 권유도 많았고, 서울에서 잠깐 활동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다 싶더라구요.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죠.”

그 이후에도 시험 삼아 본 오디션에 합격해 서울에서 활동할 기회가 생겼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최종합격자인 이영숙 씨가 서울행을 거부하는 바람에 그 작품은 다시 오디션을 치뤘고, 2차 오디션에는 그녀가 아끼는 후배가 합격했다.

힘이 된다면 계속 대전에 남아 배우 생활을 하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그녀의 생각이다. 혼자만 크겠다고 훌쩍 떠나버리지는 않겠다는 것. 극단 앙상블 단원인 그녀는 이제 지역 연극계에서 ‘허리’와 같은 역할을 맡아야 한다. 연륜이 많은 선배들과 아직 철없는 후배들 사이에서 이영숙 또래의 배우들이 담당해야 할 몫이 있다는 얘기다.

선배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그 열정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해주는 것 그녀는 앙상블 대표인 이종국 씨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이종국 선생님이 저에게는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분이세요. 함께 작품활동을 하면서 연기와 인생사는 법을 모두 배웠죠. 칭찬은 잘 안 하시지만 속정은 많으신 분이죠. 중학교 때까진 말을 더듬을 정도로 쑥스럼이 많으셨다는데, 지금 연기하시는 걸 보면 믿기지 않아요.”

많은 대전시민들을 연극무대로 불러 모았던 제 23회 대전연극제. 배우 이영숙은 이번 연극제에서 지역연극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 특히 대전 대표작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는 유난히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전좌석 매진. 당일 시간에 맞춰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은 그냥 발걸음을 돌려야 할 정도였다. 무대에 섰던 이영숙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제가 이 작품으로 연기상을 받았지만, 정말 관객들에게 상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지역 작품을 보면서 관객 에티켓이 엉망이어서 안타까웠는데, 저희가 연기하는 동안 관객들이 얼마나 집중을 하시는지… 매번 공연이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했구요.”

유료관객으로 가득한 연극무대에 서는 일. 연극배우로서 이런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은 자주 경험하지 못하는 일일 것. 다른 분야와 달리 시립예술단이 존재하지 않는데다가, 후원회 기반도 미약한 분야이기에 가장 솔직하고 현실적인 대답일 듯. 순천 인천 부산 대구 등 시립극단을 운영하고 있는 지역에 비해 대전지역 연극인들은 불안정한 구조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시립극단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에요. 경제적 안정성이 보장돼 더 많은 후배들이 양성되고, 대전지역 연극이 한걸음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해요.”라고 말한다.

어느 배역이든 그릇에 맞게 소화할 수 있는, 물과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이영숙. 소녀의 수줍음과 중견의 원숙함이 동시에 간직돼 있는 그녀의 여름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다. 
 / 이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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