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길을 가다 길을 만나다
<토마토> 길을 가다 길을 만나다
  • 월간 토마토 이용원
  • 승인 2011.05.0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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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간판으로 새 단장하고 배시시 웃는 그 곳

지역 농촌도시의 현실을 그냥 피상적으로나마 느끼고 싶다면 면소재지에 가보는 것이 좋다. 뭐 그리 힘든 일도 아니다. 논과 밭이 따라붙는 도로를 달리다가 아이스크림이나 담배를 살 수 있는 가게, 혹은 약방을 볼 수 있다면 그곳이 면소재지일 가능성이 크다.

한때는 해당 면의 생활·문화중심지로 5일장도 서고 초·중·고등학교도 있던 곳이다. 소재지인 만큼 시외버스 터미널이나 정차장이 있는 경우가 많다. 북적거렸던 그곳이 지금은 대부분 창백한 모습으로 외로움을 절절하게 흘리고 있다. 시골이 고향인 사람들은 방문한 면소재지가 어디가 됐든 고향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안쓰러움과 비슷한 감정이다.

반면, 그 파리한 풍경 속에서 무엇인가 변화의 움직임이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하면 괜히 힘이 솟고 가슴이 뿌듯해진다. 그냥 그렇게 잘 버티고 있구나. 험난한 세상 내가 큰 힘이 되어주지도 못하는데 잘 헤쳐가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간판 하나 바꿨을 뿐인데

농촌소도시 전북 진안군 백운면을 방문했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간판 때문이다. 대도시에서 중구난방, 무질서하게 걸어 놓은 간판을 정비하는 것이 간혹 뉴스에 나오기는 한다. 도시의 어지럽고 산만한 간판문제는 과잉 경쟁과 도시디자인적 개념의 비적용 등에 따른 부작용이었다. 문화도시와 명품도시 등 살기 좋은 도시 만들기에서 간판정비사업은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면서 곳곳에서 정비가 시도된다.

하지만, 농촌도시의 간판은 서로 어깨를 앞으로 내밀며 경쟁하는 것은 고사하고 쇠퇴하는 지역의 정서에 발맞춰 비슷한 모습으로 낡아간다. 개인의 의지에 따라 개중엔 새로 간판을 해 거는데 그것이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고 유독 튄다. 가게 입장에서야 광고가 잘 되겠지만 세월의 더께를 어울리지 않는 짙은 화장으로 감추려는 노력과 유사하다.

이런 현실에서 백운면 원촌마을의 간판 정비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농산물이든 관광이든 경제적 이윤추구와 직결된 것들 이외의 요소에 대해 등한시했던 지금까지의 발전 전략에 허점을 정확하게 짚어 찔러 들어온다.

작은 농촌도시와 디자인, 어딘지 어색한 궁합이라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아니라는 걸 백운면 원촌마을은 잘 보여주고 있다.

진안군 백운면 면소재지가 있는 마을이 바로 원촌마을이다. 마을엔 30호 국도가 관통한다. 모든 농촌도시가 그랬겠지만 이 마을도 한때는 장도 서고 주민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옛날 장이 섰던 곳은 주차장이 되었지만 빙 둘러 있는 가게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길가 가게들과 과거 장터 주변의 가게 간판이 올 6월 새롭게 교체되었다고 한다. 전주대 도시환경미술과 이영욱 교수가 주도해 누리사업의 하나로 진행했다. 모두 2천600만 원의 사업비가 누리사업단에서 지출되었고 간판 제작비의 10%를 가게 주인이 부담했다고 한다.

주민 손으로 일구는 ‘희망’

진안군은 이미 독창적인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관심을 받고 있는 고장이다. 이번 간판정비사업도 마을만들기 정신과 백운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생명의숲국민운동 마을조사단의 활동 등이 결합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물론, 그 중심엔 간판정비를 동의한 주민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가기만 하는 곳에서 머물고 관심을 기울이는 곳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표면적으로 가장 눈에 잘 띄는 것이 간판이었고요. 이것부터 시작을 하자는 생각에서 기획한 일입니다.”

백운면 주민이며 마을조사단 단장을 맡고 있는 이현배(손내옹기 대표) 씨의 설명이다. 참고로 백운면 원촌마을은 해남 땅끝마을에서 국토순례를 시작하는 순례단이나 백두대간종주산행을 하는 사람들, 섬진강 탐사를 위해 발원지 데미샘을 찾는 사람들이 지나는 곳이다.

이번에 교체가 이루어진 간판은 모두 34개다. 주민이 100% 참여한 것은 아니다. 이번 간판교체의 방향은 기존의 것을 최대한 유지하며 가게 주인의 삶과 그 가게가 담고 있는 콘텐츠를 부각시키면서도 주변의 것과 경쟁하지 않고 어우러지도록 제작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큰 글씨나 위치 선점 등 다른 가게보다 더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간판을 부착하는 가장 큰 이유라는 생각을 깨지 못하는 가게 주인이니 이미 돈을 들여 교체한 주민들은 이번 간판 교체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보기엔 오히려 그것이 더 의미 있지 않았나 싶다.

간판 교체를 추진한 실무자들은 주민과 계속 끊임없는 대화를 하며 의미를 공유하고 설득해 나갔다.
간판을 부착하고도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건강원 경우 간판이 처음엔 밤색 계열의 같은 색깔이었다. 하지만, 주인 할머니는 세상에 밤색 호박이 어디 있느냐며 색의 교체를 요구했고 결국 노란색으로 다시 칠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 뒤에 호박잎을 녹색으로 칠해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지만 그렇게 되면 애초 디자인 의도가 훼손되기 때문에 역시 그냥 두도록 설득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제3자가 보기엔 일련의 그 과정이 모두 의미 있고 유쾌한 실랑이다.

진안군 백운면은 현재 간판정비사업 말고도 공공미술 프로젝트와 일상생활장소 문화공간화 사업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백운면은 흰 구름 마을이다. 마을이름처럼 둥실 떠 흐르는 흰 구름이 1천m 넘는 마을 주변의 산에 걸터앉아 쉬어 가는 곳이다. 이제 흰구름처럼 마을주민들도 편안하게 쉬고, 지나는 이도 머물러 쉬어갈 수 있는 살기 좋은 마을로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주민 주도적이며 역동적인 사업 방식이 인상적이다.

대전을 비롯한 거대도시에서는 현재 다양한 도시개발사업이 벌어지고 명품도시니 창조도시니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든다며 다양한 기획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구 2천 명 남짓의 백운면 사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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