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 전공한 시인 김병호
물리학 전공한 시인 김병호
  • 월간토마토 점필정
  • 승인 2011.06.21 10: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에서 詩를 꺼내다

한 고등학생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이해하고 인류에 공헌하는 데 물리학 만한 학문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부터 우주 생성 원리까지, 물리학은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학문이다. 아마도 이 학생은 뉴턴과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 과학자들을 동경했을 터다.

그래서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겠다며 담임 선생님이 아닌 물리학 선생님께 대학 진학상담을 했다. 선생님이 기특하다고 칭찬해줄 법도 했지만, 선생님은 “물리학은 많은 학자를 요구하는 학문이 아니다.”라고 얘기했다. 그때는 그게 무슨 얘기인지 몰랐다.

대학에 진학했다. 물리학도로서 꿈이 컸는데, 생각처럼 물리학이 즐겁지 않았다. 대학 교수님이 “물리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사회에 나가는 것도 좋다.”라고 격려도 했지만, 전공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동경하던 학문이 너무나 어렵고 지루하며 딱딱했다. 더구나 1980년대는 민주화를 향한 격동의 시기. 강의실보다는 야외에서 최루탄 냄새 맡을 때가 더 잦았다.

그러다 군에 입대했다. 군 생활은 평범했다. 보통 남자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떤 계기 때문이었는지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모를 일이다. 남자들만 우글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게다가 여학생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공계 대학 진학, 여기에 가장 원초적인 남자들이 모인 조직 군대까지. 오히려 군대가 눌려 있던 감성을 끄집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대전작가회의 김희정 사무국장은 김병호 시인을 지금보다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 시인이라고 소개해줬다. 김 사무국장은 김병호 시인이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물리학 전공자이면서 시를 쓰는 전업작가이며,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개념과 용어를 시작(詩作)에 활용한다고 설명했다.

김희정 사무국장을 통해 김병호 시인과 연락이 닿았다. 전화상으로 들려오는 시원시원한 말투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5월 19일 아침, 충남 계룡시에서 김병호 시인과 만났다. 편한 복장에 슬리퍼를 신고 글쟁이를 기다리던 시인. 말투만큼이나 수더분한 모습이 참 편안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을 만난 듯한 편안함이었다.

자유를 좇고, 자유롭고 싶다

김병호 시인이 시인으로 불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공계 전공자였기에 인문계 전공자들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 전역 후 바로 복학하지 않고 유명 출판사 한길사에서 진행한 문학사숙에 참가해 당대 리얼리즘 시인 가운데 주류로 꼽히던 이시영, 김남주, 정희성 시인 등에게서 시를 배운다. 이들 시인과 정치적인 색깔이 같다는 것이 이곳 문학사숙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때 김남주 시인은 ‘시는 곧 무기다.’, ‘나는 전사다.’라는 얘기를 자주 했어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용감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처음엔 저도 ‘이것이 시인가?’라고 생각했고, 동의했어요. 그런데 그런 선생님들 가르침에 답답함이 생기더군요.”

시는 돈과 거리가 멀기에 그 자체로 자유롭다는 것이 김병호 시인의 생각이다. 그래서 정말 시인이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하고, 그 자유라는 가치가 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런데 당시 김병호 시인을 가르치던 선생님들이 ‘이렇게 쓰지 마라.’라든가 ‘이것만이 시다.’라고 강요하는 것은 ‘자유’라는 가치와 상반된다고 느꼈다.

김병호 시인은 선생님들이 하지 말라는 것이 있으면 더 파고들었단다. 그리고 선생님들과 다른 자신만의 것을 찾는 작업에 매진한다. 그들이 훌륭한 스승이자 시인이었지만, 그들이 자기가 구축한 시 세계로 제자들을 묶어두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예술적 다양성을 해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 문학계, 특히 시 분야가 침체한 것은 모두 권력화된 구조와 사람들 때문이라고 시인은 지적한다. 자기 수하를 만들어 세력을 키우고자 마구잡이로 등단시키는 요즘 풍토가 김병호 시인은 너무나 싫다.

“낯선 형식과 내용으로 시를 쓰니까 ‘과학 이론 같다.’라는 평가까지 들어봤습니다. 과학이라면 문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려운 것이란 인식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서 동인들보다 등단도 늦고, 시집 발간도 늦었어요.”

▲ 딸이 그린 캐리커쳐
1998년 <작가세계>에 시 네 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김병호 시인은 무려 8년이 지나서 첫 시집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를 냈다. 50여 편을 담은 이 시집에서 김병호 시인은 미시 세계의 현상을 일상 세계와 연결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과학을 재료 삼아 시를 써도 돼요. 시는 자유니까요. 하지만, 시를 쓰면서 우선해야 하는 것은 미학적 가치예요. 낯선 물리학 용어가 문장에 잘 녹아들어 운율과 리듬을 타도록 써야 해요.”

김병호 시인은 자신을 ‘경계인’이라고 규정했다. 문학과 과학 어느 한 분야에 확 섞이지 못하고 주류 문학계의 관심 밖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덕에 과학과 문학을 맘대로 넘나든다. 문학계나 과학계가 금기시하는 영역도 김병호 시인은 자유롭게 드나든다. 어쩌면 ‘경계인’은 ‘자유인’의 다른 표현인 것만 같다.

과학도 시처럼 아름답다

“복학하기 싫었는데, 어떻게 간신히 졸업까지 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과학이란 게 학문이 아니라 흥미로 접근하면 꽤 재밌는 분야에요. 그걸 나중에서야 깨달았어요.”

김병호 시인은 지난해 <과학 인문학; 시인과 함께하는 물리학 산책>이란 제목의 과학 인문 교양서를 냈다. 이 책은 교육과학기술부가 추천하는 과학의 달 추천도서에 꼽히는 등 유익한 도서로 수차례 꼽히기도 했다.

이 책은 질량, 관찰자, 상수, 시간, 대칭… 골치 아플 것만 같은 물리학 개념을 과학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한다. 물리학 법칙과 일상생활을 넘나들며 김병호 시인은 현대과학을 미적 영역으로 끌어온다. 김병호 시인은 사랑과 우주를 정확하고 아름답게 이야기한다. 새로운 시도이자 사회 편견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얽매이기 싫어하고 자유롭고 싶은 작가가 세상에 던져보는 돌멩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학이 싫어서 글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라는 김병호 시인. 그렇게 싫어하던 물리학을 접목해 시와 글을 쓰고 있으며, 물리학을 전공한 시인이라는 독특한 타이틀로 문학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아이러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물리학과 교수의 “물리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사회에 나가는 것도 좋다.”라는 말처럼, 물리학이나 문학(시)이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전업작가로 산다는 것

▲ 시인이 쓴 과학서적
집필과 작업은 주로 집안 거실에서 이뤄진다. TV와 컴퓨터 유혹에 시달리고, 간혹 유혹에 넘어가 하루를 공칠 때도 있지만, 웬만하면 정한 시간에 정한 목표를 채우려 노력한다. 김병호 시인은 그것을 “작가로서 최소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가끔은 필요한 책을 보려고 가까운 도서관을 찾기도 하지만, 거실 만한 곳이 없다.

요즘 김병호 시인은 약간의 공황상태라고 했다. 최근 시집 하나와 과학과 인문학 접점을 모색한 교양서 원고를 출판사로 넘겼는데, 그 뒤로 매일 ‘해야 한다.’라는 압박감이 사라지면서 머릿속이 붕 뜬 것만 같다고 했다. 원고만 끝마치면 굉장히 편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불편하고 불안한 게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나름대로 작가에게 필요한 최소 영양분을 보충하고 있어요. 필요한 책을 찾아보고, 쓰고 싶은 소설을 구상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직 집중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8월을 전후해서 시집과 교양서가 동시에 출간될 것 같다고 했다. 지금껏 작가가 추구한 것들이 더 심화하고 다듬어져 세상에 나오는 것일 터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말대로 우리나라에서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멋진 시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시인이니만큼 또 어떤 새로운 미적 충격을 던져줄지 기대가 앞선다.

마지막으로 새로 나올 시집에 실릴 시 하나를 살짝 소개해본다.

솔레파

내 쓰레빠의 궤적이 언제부턴가, 내 생의 그것이다 기울어진 전봇대가 노래한다 쓰레빠가 찍은 왼발자국은 허공의 턱수염을 쓰다듬고 오른 발자국은 전봇대를 타고 오르다가 슬쩍 늘어진 현수선*을 넘는다 솔레파, 노래를 따라가다 문 연 화장실에 한 남자가 누워있다 참 시체스럽다, 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벌떡 일어난다 그가 내 노래를 신고 있다 생의 자장 안에서 가장 편안하게 늘어진 자세, 다른 신발은 아무렇게 벗어놓지만 쓰레빠 만은 신발장 높은 곳에 고이 모셔놓는다 노래를 보면 모두 신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니, 분명 태초의 역사를 가진 본능이지만 곰팡이 낀 신발장의 높이만 가져도 생의 현수선은 공유하지 못한다 몸 어디건 거기가 제일 끝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무엇과도 화해하는 자세를 만들면 중력장 안에서 목적지까지 가장 빠르다 죽음과 최소시간 경로, 그 비가역의 경로가 낮게 깔린 구름발치서 웅얼거린다 노래가 나를 신고 다닌다 솔레파.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충청뉴스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