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대전, 오페라 배우 조병주
메이드 인 대전, 오페라 배우 조병주
  • 월간토마토 박숙현
  • 승인 2011.10.0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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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오페라계에 이바지 하고 싶다", "40부터가 시작"

어깨까지 오는 머리, 하얀 셔츠에 청바지 차림. 발목까지 올라오는 굽 있는 부츠를 신은 그는 생각했던 모습과 달랐다. 성악가 하면 떠오르는 점잖고 근엄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바리톤 조병주. 그는 자유롭게 초원을 뛰어다니는 한 마리의 야생마 같았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에 들려오는 저음의 굵직한 목소리. 그제야 그가 성악가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처음 본 사람은 운동선수나 로커인 줄 안다니 그를 본 첫 느낌이 틀리진 않았다. 자유분방해 보이는 모습. 그 속에는 록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사실 로커가 되고 싶었어요. 로커가 된다고 하니 어머니가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죠.”

그렇게 음대에 진학해 대학 졸업 때까지 밴드에서 활동했다. 예전엔 록밴드 베이스기타로, 지금은 바리톤으로 활동하는 그. 달라도 너무 다른 록과 오페라 아니냐고 묻자 그렇지 않단다.

“오페라나 록이나 하나의 음악일 뿐이에요. 그 뿌리는 같아요. 무대에서 자신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요.”

음악이든 사람이든 하나의 틀 안에서 규정지을 수 없단다. 정의내리는 순간 그 안에 갇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이유였다.

“룰에 어긋나려고는 안 하는데 자유스럽게 살려고 해요. 록의 정신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죠. 아웃사이더 기질도 있어요.”

순수한 열정, 오디션의 비결

그는 유난히 오디션과 인연이 깊은데, 대학 졸업 후 우연히 보게 된 제1회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단번에 주인공으로 캐스팅 됐다.

“오디션이 있다는 소리에 그날 무작정 서울에 갔어요. 동생이 피아노를 전공해서 반주자로 같이 갔는데 대기실에서 둘이 그랬어요. 여긴 우리가 올 곳이 아니라고. 그래서 미련 없이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오로지 실력으로만 평가했던 제1회 오페라 페스티벌은 뮤지컬계의 새바람을 위해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고 문호근 선생이 기획했던 오디션이었다.

“당시만 해도 배우를 오디션으로 뽑는 시절이 아니었어요. 만약 오디션이 아니었다면 주인공되기 힘들었을 거예요. 운이 좋았죠.”

어리고 경험도 없던 신인이었기에 혼나기도 엄청 혼났다. 하루 다섯 시간씩 연기코치와 연습하면서 연기의 기본을 배워나갔다. 덕분에 다음 공연에서 “연기할 줄 안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렇게 주인공으로 공연했던 그였지만 이태리 유학 후 귀국했을 때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예술은 산 넘어 산인 것 같았어요. 맺어놓은 관계가 없다보니 찾아주는 곳이 없었어요. 재능을 보일 곳이 없었죠. 그래서 다시 오디션을 보러 다녔어요.”

오디션장에서 만난 후배들은 “형 때문에 안 돼요. 그만 좀 오세요.”라고 말했다. 그만큼 오디션에 강했던 그. 백전백승. 그만의 오디션 비법은 뭐였을까?

“학교 다닐 때 10시간씩 연습했지만 힘들지 않았어요. 그게 저한텐 노는 거였죠. 요즘 친구들은 음악 자체보다는 그 주변에 관심이 많은 거 같아요.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에 집중하는 느낌이죠. 음악에 순수하게 접근하는 게 필요해요.”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는 것 같지만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건 몇 명뿐인 오디션. 그가 말한 답은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었다.

‘나’보다 중요한 작품

오페라에서 바리톤은 주로 악역을 맡는다. 사랑을 방해하는 주인공의 아버지, 사랑의 연적이 바리톤이다. 그러다보니 실제 나이보다 더 많은 역할도 자주 맡았다.

“30대 초반에는 내 안에서 우러나는 소리를 만들어서 냈어요. 근데 이제는 저절로 나와요.”

세월만큼 깊어진 소리. 작품을 대하는 마음도 달라졌다.

“작품을 하면서 느끼는 게 오페라는 채우는 작업이 아니라 비우는 작업이라는 것이에요. 욕심을 버려야 돼요.”

오페라에서 나보다 중요한 게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페라가수가 아니라 오페라배우라고 말한다.

“유명 성악가 중에는 연기에 비중을 두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노래로만 승부하죠. 하지만 전체적인 작품을 생각했을 때 자신이 아닌 맡은 역할을 보여주는 게 맞는다고 봐요.”

무대에서 나를 보여주기 보다는 작품으로 관객과 호흡하고 싶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스승이신 김영미 선생님께서 ‘무대 위에서 서브하는 가수가 돼라.’라고 하셨어요. 관객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관객과의 호흡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죠. 초년에는 카리스마를 보여주기 위해서 관객과 기싸움도 했는데, 어느 순간에 가니까 관객을 편안하게 마주하게 됐어요.”

처음 무대에 섰을 때만해도 손에 든 악보가 떨릴 정도로 긴장했지만, 50여 편의 오페라로 다양한 무대에 서면서 이제는 덤덤해졌다. 철저하게 계산된 무대인 만큼 실수한 적도 거의 없을 정도. 하지만 무대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은 있다.

“가끔 꿈을 꾸는데 해보지 않은 오페라 제의가 들어오는 거예요. 근데 그게 공연 1주일이나 3일을 두고 제의가 온 거죠. 거절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욕심때문에 한다고 해요.”

그런 꿈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다. 국내 창작 오페라 ‘아랑’ 때였다.

“아랑 공연이 올라가기 2주 전에 제의를 받았어요. 욕심이 나서 무조건 한다고 했죠. 공연 전에 엎어진 게 네 번 정도 있었는데, 그 정도로 새로운 시도가 많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쪽대본이란 걸 받아봤어요.”

공연 3주 전부터 본격적인 작곡이 시작되었다. 그러다보니 연습실에 침낭을 펴놓고 대본이 도착하면 연습을 했다.

“아랑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성실하게 음악 하는 자세를 찾았어요. 40대가 되면서 자칫 방만해질 수 있는 저를 일깨워준 작품이에요.”

40, 이제부터가 시작

사랑의 아픔, 배신, 질투를 다루는 오페라는 신파극이 많다. 하지만, 쉬운 내용임에도 오페라는 왠지 어렵게만 느껴진다.

“한국 사람들이 오페라를 어렵다고 느끼는데 성악가 잘못도 있어요. 노래에만 승부수를 던지기 때문이죠. 외국에서는 오페라를 재밌다고 해요. 성악가들이 노래하면서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걸 표현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는 좀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페라 시즌이 아닐 때 MIS를 통해 찾아가는 음악회를 열고 있다. Music In Story(MIS)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재밌는 오페라, 관객이 좋아하는 오페라를 만들고자 조직한 모임. 문화 소외계층을 위해 고아원, 재활원은 물론 지역사회 곳곳을 누비며 공연한다.

“처음엔 걱정했어요. 거동이 불편한 노인 분들, 지체 장애인 분들이 원어로 부르는 오페라를 이해하실까 싶었죠. 근데 배우들 표정과 호흡, 멜로디를 들으며 좋아하셨어요. 음악 자체가 순수한 언어로 통한다는 걸 느꼈죠.”

음 하나하나 섬세하게 신경 쓰는 전문가들에 비해 그들은 음악 그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많이 배운다는 그는 앞으로도 매년 찾아가는 음악회를 열 계획이다. MIS를 하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오페라를 이끌어 갈 젊은 친구들 때문이다.

“요즘에는 조직, 단체가 아니고서 오페라를 하기가 힘들어요. 배역을 오디션으로 뽑는 경우도 별로 없죠. 그러다보니 젊은 성악가들이 없어지고 있어요. 갈 길이 없다 보니 뮤지컬로 가는데 앞으로 오페라를 할 친구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생각이었죠.”

스스로를 ‘메이드 인 대전’이라 생각하기에 대전 오페라계에 이바지 하고 싶다고 했다. 많은 작품을 해왔지만 아직도 그는 작품에 목마르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한국에서 성악가가 40세가 넘으면 사양세인데 70까지 하고 싶어요. 40부터가 시작이라 생각해요. 이제 시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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