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장 구제골목 "보물이 여기 있더라"
중앙시장 구제골목 "보물이 여기 있더라"
  • 월간토마토 김의경
  • 승인 2011.11.11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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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 생산이 아닌 하나밖에 없는 '내 것'과 운명처럼 만나는 곳

어려서부터 퀴퀴한 냄새 풍기는 헌것보단 새것의 반짝임과 냄새에 열광했다. 새 옷, 새 책, 새 물건 등등. 그럴 때마다 엄마는 “어지간히 새 거 찾는다.”라며 “큰일”이라고 혀를 찼다. 난 정말 ‘헌 것 증후군’에라도 걸린 걸까.

그런 까닭에 <완전학습>, <표준학습>부터 <수학의 정석>까지 각종 참고서를 헌책으로 사주거나 사촌 언니 옷 무더기가 ‘떠밀려’ 오면 어김없이 70년대 신파극 주인공처럼 청승에 가까운 처량함을 느꼈다. ‘남이 쓰던 것’을 넘겨받았다는 ‘패배감’에서 오는 과민반응일 수도.

나야 내 물건에서 전 주인 흔적을 찾는 것이 다소 불쾌했다지만, 구제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이는 곧 새로운 놀이다. “그전엔 누가 썼을까?” 상상하는 즐거움, 헌옷 수거함을 그대로 옮겨온 듯 보이는 옷 무더기 속에서 ‘나만의 보물’을 찾는 희열.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옷이 아닌, 하나밖에 없는 ‘내 것’과 운명처럼 만나는 곳. 그런 세계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중앙동 중앙시장 안 구제가게 골목에 바로 그 세계가 있었다.

시장 안에서도 대훈서적 뒤(헌책방 거리에서 대전역 방향) 일대에 몰린 가게들은 예전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불과했던 곳이다.

시장 안내를 해준 박정민 양이 “언니, 이런 데서 잘 찾으면 보물 같은 게 하나, 두 개씩 꼭 나온다니까요.”라며 눈을 빛냈다. “정말?”이라는 말과는 반대로 내 얼굴은 영 마뜩잖다. 그도 그럴 것이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가게 바깥에서 무심하도록 뽀얗게 먼지 뒤집어쓴 채 내걸린 옷가지들, 우중충한 건물 외관, 어두침침한 실내 등은 혼자라면 들어갈 엄두도 내지 않았을 공간이다.

정민 양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 따라 곧잘 구제시장에 와서 옷과 신발, 소품 따위를 많이 샀다고 한다. 게다가 때와 주름을 불결하게 여기기보단 전에 쓰던 사람을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었단다. 무엇보다 저렴한 가격에 흔하지 않은 물건을 살 수 있어 좋아한단다. 그녀는 “같은 구제라도 주인 취향에 따라 분위기가 천차만별”이라고 귀띔해줬다.

구제시장에서는 아동복부터 바이크 옷, 발표회 드레스 등 상품 종류와 수가 어마어마하다. 아주 저렴한 가격에 좋은 물건을 건질 수 있는 가게부터 중고라도 몇십만 원하는 명품구제까지 정말 일반 보세가게처럼 주인 취향과 성격에 따라 상품과 가게 분위기는 많이 달랐다. 정민 양은 다년간 구제시장을 훑고 다닌 만큼 집중해서 살펴봐야 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처음 들어간 곳은 초 저렴한 가격에 옷과 신발, 가방 등을 살 수 있는 가게였다. 낯선 것과 마주했을 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후각이라더니 나도 모르게 킁킁대고 있었다. 쭈뼛거리는 나나 김선정 기자와 달리 정민 양 손이 바쁘다. 마치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연인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 같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뒤에 가서 살짝 입어볼 수 있어요. 보는 것과 입어보는 건 달라서 싸다고 막 샀다간 후회하는 경우가 잦거든요.”

이곳에서 정민 양은 밝은 연두색 주름치마를, 나는 여름 니트, 김선정 기자는 분홍 폴로티셔츠를 각각 3천 원씩 주고 샀다.

이어서 여러 가게에 들렀다가 20~30년 전에 전당포로 쓰였을 법한 좁은 3층짜리 목조건물에 들어갔다. 이 건물은 전체가 구제숍이었다. 온라인 카페도 운영하는 제법 규모 있는 곳이었다.

지하엔 셔츠와 점퍼, 2층과 3층에는 니트, 청바지, 청재킷, 티 등을 진열해놨다. 정민 양은 금세 빨간색 폼폼이 니트, 청록색 니트, 화려한 꽃무늬 실크블라우스를 골라놓고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뒤질세라 나도 눈에 불을 켜고 정민 양이 골라낸 자리를 뒤져봤으나, 이미 고수가 훑고 간 자리에서 더 발견할 건 없었다. 역시 구제쇼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매서운 눈인 모양이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와있던 여고생 팀은 옷을 서너 벌 사가는 것도 모자라 나가는 중에도 “꺅~! 귀여워!”라며 함성을 질러댔다. 하릴없이 여행책자에 시선을 두었던 주인아저씨 얼굴에서도 뿌듯함이 번진다. 우리에게도 1층에도 가봤느냐, 3층에도 가봤느냐 하며 더 많은 옷을 눈여겨보라고 했다.

아저씨에게 “젊은 친구들이 자주 오느냐.”라고 슬쩍 질문을 던지니, “무슨 소릴 하는 거냐.”라는 표정이다. 대전뿐 아니라 천안 등지에서도 오는 ‘전국구 구제 쇼핑 명소’를 몰라본 것에 대한 항의였다. 1997년부터 자그마치 15년이 됐다며 그 시절 청춘들이 애 엄마가 돼 찾아온다고 했다.

무엇을 살지 갈팡질팡하던 정민 양이 결국 2만 5천 원에 세 가지 모두 사기로 했다. “시장안내를 해 주려 왔다가 지름신만 맞았다.”라는 귀여운 투정을 뒤로 한 채 마지막 가게로 향했다. 소녀감성이 물씬 풍기는 가게에선 드레스, 블라우스, 그리고 다양한 모자가 있었다.

‘일제 수입구제’를 재차 강조하던 주인아줌마는 “어디서고 이런 물건 볼 수 없어.”라며 “우리 집 오는 이는 전부 솜씨가 좋아서 자수도 놓고 별거 다해. 원래보다 더 멋있게 리폼해서 나를 놀라게 한다니까.”라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본래 구제쇼핑을 제대로 하려면 종일 부지런히 돌아야 하지만, 우린 이쯤에서 그만 돌아섰다. ‘매의 눈’ 박정민 양 무거운 봉지와 달리, 나와 선정 기자는 간단한 소품 몇 개와 상의 한 벌 뿐이다. 그래도 괜스레 뿌듯하다. 한편으론 설레기까지 한다.

그건 옷 무더기 속에서 ‘내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그 운명적인 만남이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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