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여지도…용운동1 문충사 근처
대전여지도…용운동1 문충사 근처
  • 월간토마토 이용원
  • 승인 2011.12.02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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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꿈틀거리는 그 어디쯤

한산한 낮, 주택가 골목길은 묘한 기운을 담는다. 큰 대로를 따라 노동과 쉼의 경계가 분명하고, 그 경계는 하늘로 이어져 주택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주택단지는 대부분이 일터로 떠난 한낮에도, 온기를 간직한 온돌처럼 여전히 푸근하다. 그 푸근함이 일상적이지 않은 시간에 주택가 골목을 배회하는 직장인에게 편안함을 주는 모양이다. 심신이 피곤할 때 잘 갖춰놓은 공원이나 하천가를 걷는 것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만, 주택가 골목을 걷는 것도 그에 못지않다.

빨갛게 익어가는 감과 물드는 단풍, 잎사귀 떨어진 무화과나무, 은행나무, 잘 다듬어 놓은 향나무, 국화꽃, 유치원에서 재잘 거리는 아이들 목소리,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할머니, 할아버지, 골목 안 기름집에서 나오는 고소한 냄새, 낡은 간판아래 구멍가게, 세탁소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 골목을 가로지르다 낯선 이에게 뜨악한 시선을 보내는 길고양이, 주둥이만 대문 밖으로 내민 채 자지러지게 짖어대는 개, 모든 요소가 가슴을 어루만지며 위로한다.

주택단지 골목을 거닐며 집집이 꾸민 정원을 담장 너머로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만나는 이에게 미소 짓고 눈인사를 나누는 것도 정겹다.

‘찾기 어려운 모리 마을’

대전 동구 용운동은 넓다. 역사도 깊다. 용운동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낸 ‘용뱅이’ 마을은 선암어린이공원을 중심으로 북서쪽에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선암어린이 공원을 중심으로 남동쪽 기슭 마을을 범위로 삼았다. 자연마을로는 모리마을이 있던 곳이다.

지금 그 마을 형태가 사라지고 조그만 아파트 이름으로 남았다. 대전향토사료관 기록은 모리(慕里), 모오리(毛五里)는 임진왜란 때 이 마을이 피해가 없어 다른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했다. 그래서 연모할 모(慕)자를 썼단다. 털 모(毛)자와 다섯 오(五)자를 써 표기하는 모오리에 대한 설명은 없다. 마을에서 만난 심부근(72) 씨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에 마을이 하도 나무가 꽉 들어찬 가운데 있어서 한 번 왔던 사람도 다시 마을을 찾으려면 도대체 어디인지 ‘몰라’ 모리 마을이라 불렀다고 해요.”

사람 한 명 바듯이 지날 조그만 길 말고는 하늘만 빠끔했지, 밖에서 쉽게 마을을 찾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기록에 전하는 것과 내용은 달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임진왜란 때 피해가 없었다면, 왜군이 마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 터다. 지금은 개활지로 시원하게 보이는 마을이 과거에 밖에서 찾아들어가기도 힘들었던 곳이라니 신기하다. 더군다나 마을 인근에는 계족산 자락에서 이어지는 성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적 요충지였을 터인데 말이다. 여하튼,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포도밭이 주택단지로’

이번에 답사한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선 곳은 과거 야트막한 산이었다. 주택단지 골목 경사로를 토대로 가늠해 볼 때 높이 솟지 않고 야트막하게 퍼져 있는 야산이었을 게다. 선암어린이공원이 있는 곳이 정상부근이다. 산은 낮았지만, 동네 아이들과 청년들이 토끼몰이를 할 정도로 나무가 우거지긴 했었다. 은진 송 씨들 산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이 야트막한 야산에 북쪽 새울 방면으로 넘어가는 모리고개가 있었단다.

이후, 사람들이 정상부분까지 바짝 붙여 논과 밭으로 일궜고 지금과 같은 주택단지가 들어서기 전에는 포도밭이 많았던 곳이다.

그러다 1985년 무렵부터 주택단지 개발계획을 수립해 논과 밭을 다져 택지개발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집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20년 조금 넘은 셈이다. 대부분 주택은 붉은 벽돌을 기본으로 한 2층 집이 많은데 그 생김이 일률적이지 않고 취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이 시기 현대 건축 양식에 대한 표본조사가 필요하다면 둘러보아도 좋을 동네다.

집마다 정원수가 다양한데 그중 가장 많은 것은 감나무다. 골목에서 만난 금씨 아저씨도 홍시와 단감을 따느라 여념이 없었다. 감나무 가지는 잘 부러져 위험하다는 둥, 새살떠는 이방인에게 아저씨는 홍시 하나를 던져준다. 마당에서 함께 감을 따던 아주머니도 문을 열고 나와 가지에 달린 단감 몇 개를 건네주곤 “사각거리고 맛있다.”라는 말을 남긴 채 대문 안으로 사라진다. 담장 너머로 날아온 ‘정’에 웃음이 난다. 커다랗고 껍질이 두꺼운 홍시는 무척 달았다. 단감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우국지사 모신 ‘문충사’

이번에 돌아본 주택단지와 판암주공 4,5단지 사이에는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4호인 문충사가 있다. 조선말기 학자이며 우국지사인 송병선과 그의 동생 병순을 배향한 곳이다. 송병선은 우암 송시열의 9세손이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상경하여 고종에게 을사오적 처형 등을 주장하였다. 반대 운동을 계속 벌이려 했으나 일본헌병대에 의해 대전으로 이송되었다. 울분을 참지 못한 그는 을사오적 처단과 국권회복을 바라는 글을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동생 병순도 1910년 망국을 통분하며 형을 따라 순국했다.

문충사는 본래 1908년 충청북도 영동군에 건립했으나 1966년 송병선의 순국지인 현 위치로 이전했다. 외삼문 안에 용동서원 현판이 걸린 강당이 있고 내삼문 안에 사당이 있다. 1970년 건립한 용동서원은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따랐다.

본래 문충사 주변에는 담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헐어 너른 잔디밭에 출입이 자유롭다. 문충사 안 출입은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도 담장이 낮아 골목을 따라 한 바퀴 돌며 내부를 들여다 볼 수는 있다. 잔디밭에 심어 놓은 조경수와 문충사 내부 조경수가 아주 좋다.

자연과 ‘함께’였던 마을

야트막한 산자락에 형성한 마을이어서 어디든 시야가 트인 곳에서 보면 주변 전경이 제법 들어온다. 마을 동쪽으로는 멀리 방송시설을 설치한 식장산이 보이고 가까이에는 계족산 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 서쪽으로는 황대봉과 그 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황대봉 자락은 쌍청당 인근으로 떨어진다.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포근함을 느낀 건 위압적이지 않게 낮게 자리한 산자락이 마을 전체를 휘감고 있는 형국이어서 그랬나 보다.

이런 산세 속에 터 잡은 마을은 분명 꿈틀거리는 용의 형상이었을 것이다. 용뱅이라는 마을 이름을 비롯해 용솟골, 용수리, 용날, 신선바위 등 용운동 이곳저곳에서 발견하는 용과 관련한 지명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에는 산세와 물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며 마을이 산에 기대고 물을 바라보며 들어섰다. 분명 자연과 ‘함께’였다. 지금 애써 찾아 느끼는 느낌과는 다른 포근함이 더했을 터다. 지금은 필요에 따라 산을 자르거나 굴을 뚫고 물 위에 콘크리트를 덮어 길을 만들었다.

분명 ‘함께’는 아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던 포근함은 목을 쭉 빼고 애써 사방을 둘러보아야 간신히 가늠할 수 있을 정도다. 옅은 흔적이 남아 있어 더욱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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