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여지도 61…유성구 신동(양지편)
대전여지도 61…유성구 신동(양지편)
  • 월간토마토 이용원
  • 승인 2012.06.0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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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햇살이 몽땅마을에 내려앉았다

조용한 마을 ‘신동’이 올해 초, 많은 언론에 오르내렸다. ‘국제과학비지니스벨트사업’ 때문이다. 국토해양부가 대전광역시 유성구 신동 마을 일대 369만㎡를 거점지구로 지정 고시했다.

▲ 유성구 신동 마을의 전경 모습
오는 2017년까지 5조 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란다. 이는 곧 몇 년 안에 수백 년을 이어온 마을 하나가 사라진다는 의미기도 하다. 거친 봄바람 불던 날, 마을을 찾았다.

신동을 구성하는 녹골과 새터, 가장골, 제집말, 양지편 중 양지편이다. 마을 앞 길가에 세운 마을 유래비나 기록에 따르면 이런 구분이 맞으나 현지에서 만난 주민 증언이 모두 달라 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유는 ‘녹골마을’에 대한 이해의 차이였다. 많은 이가 녹골을 신동과 같은 범위로 증언했다. 양지편 주민은 “양지편이지만, 여기도 녹골이여”라고 말하는 이가 많았다. 이는 역사가 가장 깊은 마을에 대한 종속적 인식에 원인이 있는 듯하다.

1900년대 양지편의 행정명은 신흥리였고 새터는 신대리였다. 이와 함께 이웃한 마을은 녹동리였다. 신흥과 신대, 모두 새로 형성한 마을이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 녹골이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마을에서 분가한 형태의 마을이 본 마을인 녹골마을 범위를 확장해 사고하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신동 자연마을을 크게 나누면 이렇게 세 개 마을이고 한때 다른 행정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주민들 사이에서는 모두 한마을인 셈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 될 것은 없다. 실제 삶을 풀어가는 것도 한마을이니 말이다.

연둣빛 눈부신 참나무 숲
▲ 참나무 숲
양지바르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양지편’은 바람말이었다. 산 너머 금강이 있어선지, 주변을 둘러싼 산이 그리 높지 않아선지,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마을에 들어온 바람은 구석구석 샅샅이 훑고 구즉 쪽으로 빠져나갔다.

양지편은 행정구역상 신동 2통이다. 연기군과 송강동을 연결하는 2차선 도롯가에 있다. 이 도로가 금남구즉로다. 마을 앞 도로에는 수령이 제법 된 것으로 보이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아름다운 수형을 자랑하며 서 있다. 가로수로 심은 플라타너스 사이에서 독보적인 자태를 뽐낸다.

오래전, 지금처럼 도로가 넓지 않고 달구지 하나 지나다닐 정도였을 때, 그곳은 그냥 논과 논 사이에 난 작은 길이었을 게다. 그 한편에 그늘을 만들기 위해 심어 놓은 느티나무가 지금은 가로수가 있어야 할 위치에 절묘하게 놓여 있지 싶다. 도로를 확장하면서도 살아남은 나무가 기특하기까지 하다.

마을 초입 경로당 앞 긴 벤치에는 따뜻한 햇볕만 내려앉는다. 그곳에 서서 올려다본 마을 뒷산은 참나무가 대부분이다. 연둣빛으로 물이 오른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부드럽다. 살금살금 찾아온 봄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마을 초입에서 보았을 때는 그렇게 크지 않은 마을이라 생각했는데 한 바퀴 도는 동안 적잖은 마을 크기에 놀란다. 산자락에 올라앉은 마을인지라 집이 계단식 논처럼 들어섰다. 예쁘게 새로 지은 집도 많지만, 흙벽을 간직한 오래된 집도 많았고 더러 빈집도 눈에 들어왔다.

파란색과 연두색으로 칠해 인상적인 대문도 여럿이다. 전체적으로 마을은 정갈하고 깔끔했다. 골목에 심은 다양한 꽃이 예쁜 색을 발한다. 앞으로 닥칠 마을 운명을 생각하면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금탄나루와 검시나루

“근데, 언제 뜯긴데? 아이고 빨리 뜯겨야지. 농사짓기 대간해서 원.”
양지편 마을 주민 박종희(81) 할머니는 못자리를 하다 점심을 챙기기 위해 막 집으로 들어선 참이었다. 고된 농사일에 이주보상을 받아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 보다.

“그래도 우리 마을이 살기는 정말 좋지. 따뜻하고 인심도 좋고” 할머니가 이주할 곳도 양지편처럼 따뜻하고 인심 좋은 곳이었으면 좋겠다.마을 북쪽을 막아주는 산등성이 때문에 금강이 보이지 않지만, 산을 넘어 조금 더 가면 금강이다. 갑천과 만난 금강이 조금 더 내려가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매포역을 지나 북쪽으로 잠깐 솟구쳤다가 내려온다.

주민들은 주로 매포역에서 기차를 이용하거나 존돌이라는 마을 방면으로 가고 싶으면 금탄나루를 이용했고, 신동마을 사람들이 부강이나 검시마을에 갈 때는 검시나루를 이용했다.

매포역은 대전장과 신탄진장을 보러 갈 때 이용하거나 대전으로 통학하는 학생이 주로 이용했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나루터에서 나무로 만든 나룻배를 이용했다.

“금탄나루에서 배타고 매포역에 갔어요. 거기서 기차 타고 대전역에 갔지요. 내가 대전중학교에 다녔는데 토요일에는 그냥 걸어왔어요. 한 서너 시간 걸렸던 것 같아요. 신탄진 통해서 회덕으로 걸어갔어요”

막 볼일을 보러 밖에 나가던 조방욱(73) 통장 얘기다. “그때는 물도 깊고 비만 조금 오면 나루에 배가 뜨지 못했지. 마을 앞 도로는 구루마 하나 다닐 정도였는데, 신탄진장이나 대평장을 보거나 구즉동사무소에 갈 때 이용했어” 박종희 할머니도 나룻배에 대한 기억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당시 뱃삯은 탈 때마다 지급하는 형식이 아니었다. 마을 단위로 일 년에 두 번씩 걷어 냈다. 여름에는 보리 한 말, 가을에는 나락 한 말이 뱃삯이었다.
▲ 윤채순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 모습
100년 우물 아직도 ‘퐁퐁'
마을에는 옛날부터 사용했던 우물이 아직도 몇 개 남아 있다. 직접 확인한 것은 두 곳이다. 지금은 시멘트를 이용해 우물을 고쳐 놓았다. 양지편은 본래 물이 그리 풍요롭지 않은 마을이었단다. 여기저기 땅을 파도 양껏 물이 나오지 않았다. 남아 있는 우물 두 곳 중 좀 더 북쪽에 있는 우물 옆집에는 윤채순(75) 할머니가 살고 있다.

“내가 19살에 시집왔는데 그때도 있었고. 시어머니가 계속 물을 길어다 먹었으니 한 100년은 되었을 거예요. 지금은 안 먹는데, 그냥 허드렛물로 쓰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에요.” 할머니는 우물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집에서 홀로 살고 있다. 남쪽을 바라보는 집은 일자형이다.

서쪽으로 부엌을 두었다. 시멘트로 보수를 했지만 부엌문과 형태는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했던, 오래전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툇마루에 서면 멀리 광새골과 광새들이 보인다. 마을 앞 도로를 건너면 보이는 곳이다. 경지정리하기 전에는 논과 밭이 섞여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논이다.

너른 평야가 아닌 골짜기 논인데 경지정리를 잘 해두었다. 마당 동편으로는 농기계를 보관하고 한때, 집돼지 한 마리도 길렀을 것 같은 창고가 있고 마당 서쪽으로는 사랑채가 놓여 있다.

사랑채 기둥에는 지난 겨울 방안에 들어온 것을 잡아 두었다는 지네 몇 마리가 매달려 말라가고 있다. 윤채순 할머니 집에서 나와 산등성이로 올랐다. 마을이 기댄 이 산줄기는 마을 동쪽 소문산성에서 뻗어온 줄기라고 조방욱 통장은 설명했다.
▲마을에서 산등성이로 오르는 길이 시멘트로 깔끔하게 포장돼 있다.
거칠지 않은 농토와 계곡
산등성이는 높지 않다. 마을에서 산등성이로 오르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했다. 산불 예방과 진화를 위해 만들어 놓은 임도라기보다는 들녘으로 향하는 ‘농로’ 성격이 더 강했다. 등성이에 올라 바라본 북쪽에는 농지가 꽤 넓게 퍼져 있다. 산이 만들어낸 골짜기지만 거칠지 않고 완만해 억센 농토는 아니었다.

그곳에 서면, 농토뿐 아니라 마을 전경이 한눈에 잡힌다. 차곡차곡 평지를 향해 내려앉은 집과 농토, 비닐하우스, 금남면 쪽으로 굽이져 뻗어 나간 마을 앞 도로까지. 남쪽으로 이웃한 둔곡동과 경계를 이루는 산도 야트막하니 부드럽다.

마을과 그 지형이 주는 부드러움은 ‘시간의 깊이’를 설명한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대부분 풍광이 조만간 사라질 풍광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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