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역사는 떠나고 나는 여기 있지요
80년 역사는 떠나고 나는 여기 있지요
  • 글·사진 이수연
  • 승인 2013.01.04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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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르타주_충남도청 이전

2012년 10월 19일, 충남도청 이전 기념행사에서 우리가 주목한 한 마디가 있었다. 도청 이전을 안타까워하며 며칠 밤을 지새웠다는 식당 ‘고려회관’ 사장 홍순예 씨는 “충남도청 직원들 덕분에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떠나시니 아쉽습니다.”라며 울먹였다.

오지 않을 것 같던 12월이 오고 도청은 이전을 시작했다. 먼저 나가도 업무적으로 문제가 없는 곳이 먼저 나가고, 돌봐야할 것이 많은 부서가 나중에 나가는 것으로 순서를 정해 12월 도청에서는 수많은 짐이 빠져나갔다. 2012년 12월 18일 가뜩이나 별일 없이 조용한 도청 복도에는 덩그러니 나뒹구는 짐과 아직 나가지 않은 부서 사람만 간간히 보였다.

충남도청총무과 / 도청이전 T/F 팀장 안상만 씨는 “도청이 80년 동안 이 자리에 있었으니, 정말로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그러나 대전이 광역시로 분리되고 충청남도민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힘든 점이 많았습니다. 이전하는 것이 맞지요.”라며 “그동안 정든 곳도 많았습니다. 상인 분들도 어려움이 클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도청 벽에 붙은 현수막 하나가 눈길을 끈다. “도청직원 여러분! 그동안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현수막을 붙인 파란들 식당을 찾았다. 파란들 식당은 20년 정도 이 자리를 지켰다. 큰 키에 점잖은 말투의 이기창(62) 씨는 “시청, MBC가 빠져나갔을 때도 위기였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시청이 둔산동으로 이전할 때 둔산동에 2호점을 내기도 했다. 오리고기만 전문으로 했는데, 마침 조류독감이 발생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둔산동 식당은 문을 닫고, 다시 선화동에서만 식당을 운영했다. 그런데 도청도 떠나간다는 소리가 스멀스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청 이전 이야기가 나오면서 내포 신도시에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조건이 맞는 곳이 있으면 함께 떠날 수도 있다. 조건이라는 전제에는 많은 것을 내포한다. 이 식당이 본인 소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떠나는 것이다. 아직은 장사를 더 해야만 한다.

타향골 식당 주인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장사한지 24년이 다 되어 가는데, 도청이나 시청, MBC 등 사람이 많은 곳이 이전하면서 계속 타격을 받았다. 자리를 잡아갈라 치면 사람이 빠져나가니 썰렁하고, 착잡하고, 서운하다. 사람이 없으니 이 동네 사람들 다 막막하다며 힘없는 목소리로 “당장1월이 걱정이지.”라고 말한다.

후생관, 멍석골, 구미횟집, 부여식당 등은 문을 닫았다. 선화동 근처 식당 대부분 도청 직원 상대로 수입을 낸다. 도청 직원의 말로는 문 닫은 집은 임대기간 만료와 도청 이전이 겹쳐 더는 임대기간을 늘리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도청과 함께 조용히 떠날 준비를 하기도 했고, 이미떠나기도 했다.

난 자리에 다시 무엇이 들까?
당장 대안 없이 도청 터만을 바라보는 상권을 위해 시에서도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했다. 방안 중 하나는 시·구 공무원, 시 산하 기관·단체 직원을 대상으로 상권 보호를 위한 ‘도청사 주변 식당·상가 이용의 날’을 지정해 원도심에 식사를 하러 오게 하는 것이다. 얼마 전 그렇게 시청 공무원이 찾았다는 식당 주인은 “마음이야 그래. 참 고맙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어. 도청에 버금가는 인원이 있는 기관이 빨리 들어와야지. 그것도 한참 후겠지.”라고 말했다.

행정기관에서는 주변 상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해가기도 했다. 나룻터 식당 유인순(66) 씨는 “글쎄, 나는 중구청이랑 중부경찰서 왔으면 좋겠다고 했어. 내가 이거 써놓고서는 ‘이렇게 쓰면다 해주는 거야?’라고 물었더니 글쎄 사람들이 많이 바라면 해줄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게 되겠어? 아직은 경찰청 안 갔으니까 그냥 버틸 때까지 해봐야지. 도청 분들이 그동안 팔아준 것이야 고맙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지.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있다 보면 아가씨처럼 반가운 손님도 오고하지 않겠
어? 아가씨가 손님 좀 많이 데리고 와”라며 연신 웃었다.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이렇지요
“도청이전하면 상권 죽는가, 사는가, 얘기하는겨? 당연히 죽지!”라고 말을 꺼낸 진선미 식당 진기심(70) 씨는 시청, MBC가 있던 시절부터 장사했다. 처음 장사 시작할 적 바글바글 사람이 들끓던 추억을 신명나게 이야기했다.

“11시부터 3시까지 점심시간이 안 끝났어. 자리가 없어서 못 팔았지. 지금은 나 혼자서도 하지만, 그때는 딸 하나랑 영감이랑 아줌마 셋이 랑 나까지 여섯이서 앉을 새가 없었어. 손님한테 어서오시라는 인사하면 그 손님은 대접받는 거였다니까? 시청, MBC 다 빠져나가고 나서부터 우리는 손님 별로 없어. 하루에 네 테이블 받으면 많이 받는 거야. 돈 있는 사람이야 어디든 따라가겄지만, 우리 는 여기가 내 것이고, 나이 들었는데 어딜 따라가. 내가 슬하에 삼 남매야. 자식들이 손주 데리고 오면 삼겹살이라도 한 접시 먹일 벌이 하려고 불 켜고 있지. 우리 집 양반이 나한테 맨날 그래. 당신은 왜 그렇게 태평하냐고. 그럼 나는 그러지. 어차피 먹는 장사하는데, 남으면 우리가 먹으면 되지. 안 그렇소?”

그리고 한참을 불 꺼진 식당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진선미 식당은 진 씨의 이름을 따 지은 것이다. 식당을 하기 전 진 씨와 남편은 빵집을 운영했다. 빵 만드는 기술이 있는 바깥양반과 인심 좋고 넉살 좋은 진 씨 덕분에 제법 장사가 됐다. 그 건물은 세를 얻어 하던 곳인데, 건물 주인이 죽고 나자 상속자인 아들이 건물을 판다고 진 씨 내외를 내몰았다. 가게 자리를 알아보다가 지금 자리를 얻었다. 무슨 장사를 할까 고민했다. 처음 일 년인가는 칼국수를 팔다가 잘 되지 않았다.

후라이팬에 지글지글 밥을 볶아 주는 밥두루치기라는 메뉴를 개발했다.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세금조사 나온 세무서 양반이 장사 잘 되느냐고 물으면 “그럼, 아저씨. 여기가 장사 안 되면 어디가 되겄소?”라고 받아쳤다. 세무서에서 나온 사람이 매번 놀라며 “아니. 다들 장사 안 된다고 푸념인데, 아주머니는 왜 그렇게 솔직해?”라고 진 씨를 놀리기도 했다. 예전에는 그렇게 세무서에서 직접 나와 세금을 걷었다. 진 씨는 버는 만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장사 잘 되는 것이야 뻔히 보면 아는데, 그걸 뭘 숨기느냐고 타박을 줬다.

진한 눈썹에 강한 인상의 진 씨는 소녀처럼 웃으며 며느리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며느리가 딸처럼 예쁘다며 며느리가 저기 멀리서 오면 “우리 이쁜이 왔어~”라고 말하며 꼭 껴안아준다고 했다. 도청이 떠나도 도청이 떠나지 않아도 진 씨는 그렇게 예쁜 며느리와 아들, 딸에게 삼겹살 한 접시씩 내어줄 수만 있으면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되겠지요
도청 옆 포장마차 송봉용(58) 씨는 아침을 굶고 오는 도청 식구들에게 아침 국수를 팔았다. 도청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요깃거리로도 인기가 좋았다. 도청 출입 기자 중 단골이 둘 있었는데, 요즘 혼자 다니기에 왜 혼자 오느냐고 물었더니 “그 선배는 신청사로 출입을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도청 식구들과 함께 도청 식구들 때문에 오는 손님들마저 모두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글쎄요. 올해가 30년이고 이제 내년이면 31년이네. 도청 구내식당은 아침을 안 하니까 아침국수를 팔았지~ 어쩌긴 뭘 어째요. 그냥 국수 좀 덜 말아와야지.” 그리고 손님 하나가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점심을 미처 먹지 못한 손님은 이것저것 먹으며 도청이 떠나면 어쩌냐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송 씨는 연신 아침에 말아오던 국수나 덜 말아온다고 말했다. 송 씨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인상 찌푸린다고 떠날 도청이 안 떠나나요? 울고불고 한다고 안 떠나는 것도 아니고, 웃어야지. 어째요~”
도청 내에 석유를 넣던 현대석유도 걱정이 태산이다. 하루에 4~50통의 석유를 도청에 넣었고, 수입의 많은 부분을 도청이 채워줬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걱정이야 되지만, 다들 살긴 살아요~”

그래도 우리는 오늘을 살겠지요
끝내 고려회관 홍순예 사장은 만나지 못했다. 갈 때마다 자리를 비웠고, 메모를 남겨 놓았으나 만나지 못했다. 고려회관 또한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지만, 떠나지 않고 장사를 계속 할 것이라고 했다.

12월 24일 다시 찾은 도청은 더 조용했다. 계속 짐이 빠져나갔고, 거의 모든 부서가 떠났다. 복도마다 아직 박스에 담기지 못한 짐이 쌓여 있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 몇과 조용히 이사를 기다리는 부서 몇이 남아 이제 곧 옛 충남도청이 될 건물은 조용하고 스산했다. 80년 역사가 서서히 빠져나가고, 신청사에서는 1월 2일부터 본격적인 업무를 시행한다. 한동안은 썰렁한 빈 청사만 이곳에 남을 것이다. 사람이 빠져 나간 뒤 온기를 채우지 못해 남은 사람들 또한 그 추위를 겪으며 앓는 소리, 볼멘소리가 터져 나올 것이다.

한참 저녁 장사 준비를 하던 조정순(53) 씨는 도청 근처에서 막국수 전문점을 연지 1년 밖에 되지 않았다. 30년 동안 이곳저곳에서 장사했다. 도청이 떠난다는 사실도 알고, 주변이 웅성거리는 것도 알지만, 조 씨는 큰 걱정을 하진 않는다.

“점심 장사는 거의 도청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부서마다 장부 만들어 놓고 먹고 하니까. 그런데 공무원이 돈이 어딨어. 그냥 밥 한 끼 먹는 거지. 물론, 도청이 떠나면 타격이 있겠지. 나도 장사하는 사람이니까 사람 많은데서 하는 게 좋고! 그런데 도청만 바라보고 ‘나 죽었소.’ 할수는 없잖아. 장사라는 건 말이야. 한 팀이 빠져나가면 또 한 팀이 오게 돼 있어. 도청 사람들이 나가면 또 다른 사람이 오고, 안 오면 말고.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살면 되는 거고. 오면 또 오는 대로 살면 되는 거고. 손님이 없어서 문을 닫아야 되면 닫으면 되는 거고. 안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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