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나라에는 소설이 필요하다
취한 나라에는 소설이 필요하다
  • 글 성수진 사진 성기영
  • 승인 2013.02.15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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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예술인_ 소설가 김수남

“아, 이놈 탁배기 맛 한 번 좋다. 은자골에서 만들었다네. 이름이 참 예쁘다. 맛도 좋고…. 막걸리라는 게 그런 것이거든. 달아도 안 되고, 진해도 안 되는 것이여. 맛이 없는 게 맛있는 거지. 아, 이 집 막걸리 맛있네.”
인터뷰를 마치고 막걸리 집에서는 몇 번 막걸릿잔이 돌았다. 살짝 덥힌 막걸리는 유난히 추웠던 날 제격이었다.

<똥구 이야기>(1998)에서 ‘똥구’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사러 제법 멀리까지 간다. 짝사랑하던 ‘끝순이’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이 즐겁다. <똥구 이야기>와 <달바라기>(1980)는 소설가 김수남의 자전소설이다.

“그때 아버지 심부름하면서 마셨던 막걸리도 참 맛있었지. 이런 맛이었어. 맛이 나는 듯, 안 나는 듯했지.”

▲ 소설가 김수남씨
막걸리로 기억하는 어린 시절, 대전천에 ‘하꼬방’이라고 불린 판잣집이 늘어서 있었다. 1944년에 태어난 김수남 소설가는, 어린 나이였지만 6.25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6.25가 나던 1950년, 일곱 살 나이로 대전에서 떠나는 마지막 피난열차를 탔다. 보따리를 묶은 삼베 끈으로 어머니는 자신의 허리와 김수남 소설가의 허리를 묶었다. <똥구 이야기>에서 그는 그때의 참혹했던 모습을 ‘창이란 차창마다 유리창은 다 깨졌고 사람들은 그 깨진 차창으로 대갈통을 깨져라 들이밀었다.’라고 묘사했다.

 피난을 간 영천 쪽에서는 두어 달 머물다 대전으로 돌아왔다. 대전에 남아있는 것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모습뿐이었다. 집을 잃은 사람들,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은 대전천 근처에 판자촌을 짓기 시작했다.

“지질하게도 가난하게 살았어요. 그래서 뭘 하고 싶다는 꿈도 없었어요.”
꿈 없던 소년이었지만, 좋아하는 것은 뚜렷했다. 문학에 관한 관심이라기보다,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만화를 읽던 아이가 동화를 읽다, 남독(濫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한 책 대여점에서 읽을 만한 책을 모두 섭렵하면, 대여점을 옮겨가며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죽음이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도처에 죽음이 널려 있었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여러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유난히 김수남 소설가를 예뻐하고,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 어머니는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세상을 떠났다.
“새어머니라는 사람이 들락날락 거렸어요. 아버지가 신중하지 못해서 몇 명이 들락날락했죠. 고3 때까지 있던 마지막 새어머니가 선술집을 했어요. 수업 끝나고 집 방향이 같은 애들끼리 가는 길에 그 선술집이 있었어요. 새어머니가 선술집 하는 걸 말하기 싫어서 선술집이 나오기 전에 ‘난 이쪽으로 가.’ 하면서 인사하고, 애들이 사라진 다음에 다시 집으로 갔어요.”

아무에게도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던 내성적인 고등학생은 내성적인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 원하는 학교, 학과는 아니었지만, 장학생이 된 차에 충남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친구를 따라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고 싶었는데 원서 한 장 내는 게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신문사에서 활동하는 기회는 다른 이유로 찾아왔다. 신문사 기자 친구가 수필 한 편을 써달라고 한 것을 계기로 낸 ‘국문과와 목구멍’이란 수필이 반응이 좋았다. 국문과 나와서 목에 풀칠이나 하겠느냐는 자조적인 풍자가 담긴 글이었다. 청탁이 계속 들어와 학교 신문에 수필을 몇 편 더 실었다. 소설이 뭔지도 모르고 써낸 소설은 충남대학교 문학상에서 가작으로 당선했다.

그리고 다음 해 1966년 어느 날, 김수남 소설가는 당시 ‘최연소 등단’이라는 영예로운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조부사망급래(祖父死亡急來)>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장손인 대학생 주인공 ‘병구’는 장례식에 가느냐 마느냐 하는 고민에 휩싸인다. 한일회담 반대 데모, 일찌감치 결혼한 동료, 엉터리 교수 등의 이야기로 함께 묶어 사회의 온갖 부조리함에 관해 이야기했다. 할아버지와 정도 없었는데 장손이라는 이유로 장례식에 가는 것은 세속적 삶의 굴레에 화합하는 것이고, 가지 않는 것은 저항의 상징이었다. 결국 ‘병구’는 장례식에 가려고 밤차를 타러 간다.

“그 당시 젊은이의 표상이었죠. 한일회담 반대 데모는 나도 참석했어요. 그런데 그걸로 끝난 거지 뭐. 65년에 한일회담이 이루어졌고요. 갈등하고 고뇌하지만, 그걸 뒤엎을 용기는 없는 젊은이가 ‘병구’예요. 그 삶의 조각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거죠. 그게 누적된 결과가 대선 결과고요.”

“‘병구’가 장례식에 가는 것이 기성세대의 제도적 관습과 화해하는 것은 아니고 수용이에요. 나는 아직도 정치적인 것은 표현 안 해. 그렇지만 나 자신은 대선 패배 때문에 정신적 공황을 겪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자살할 순 없지 않겠어요. 그런 의미의 수용이에요. 다시 새날을 기다려야지.”

어려서 내성적이고 수줍은 소년의 얼굴에 시간이 쌓이며 고집스러운 주름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한일회담을 비롯한 정치, 역사, 사회 시스템 문제 등 사회 부조리에 관해 끌어 오르는 마음을 토해내고 싶었다. 목소리를 내는 방법은 글이 되었다. 진짜 칼 대신, 글이라는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글 속에 교묘히 숨겼다. 그렇게 해야 하는 시대였다.

모두가 똥탓이다. 똥이 이처럼 중요한 때에 고통을 주어서야, 나의 인생은 끝장이다. 방덕씨는 아침의 사내를 증오했다. 규칙적인 아침의 배변을 파탄나게 한 사내에 방덕씨는 진한 혐오를 퍼부었다. <어느 하루의 別曲>(1974) 중

<어느 하루의 別曲>의 ‘방덕씨’는 아침마다 배변하는 습관이 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배변 활동을 하려던 참이었다. 세 사람의 침입자가 나타나서 ‘방덕씨’에게 린치를 가한다. 그 바람에 배변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출근한다. 알고 보니 침입자는 ‘방덕씨’가 전에 버스에서 소매치기하는 광경을 보고 참다못해 한마디 했던 일당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쓸 수 없던 시절, 1970년대였다. 김수남 소설가는 언론의 자유를 슬그머니 ‘똥 누기’로 바꾸었다. 배변처럼 자연스러운 활동을 뭐라고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산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는 것에만 관심 있는 작가들도 있지.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산과 사랑을 노래하더라도 법과 질서에 대한 연민의 정 같은 걸 작가라면 가지고 있어야지.”

항상 못 가진 자의 편에 서 있으려 노력했다. 못 가진 자들을 작품에 등장시켜 그들의 입으로 그들의 처지를 대변했다. 그들은 김수남 소설가 자신이기도 했다.

중교에서 대흥교 사이의 원동 초등학교 쪽으로 이어간 대전천 둑에 하꼬방들이 너덜너덜 기워진 헝겊처럼 들어서기 시작했다. 처음에 중교에서 한 채 한 채 들어서던 하꼬방은 첫집이 두꺼비집처럼 웅크리고 세워진 지 석 달도 못 되어서 무려 백 미터도 넘는 일렬종대로 변했다. <달바라기> 중

풍자로 시작했던 소설은 서정적 세계로까지 뻗어 나갔다. 1980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해 호평을 받은 <달바라기>는 김수남 소설가의 유년 시절 기억을 바탕으로 쓴 자전 소설이다. 전쟁 직후, 아무것도 없던 시절.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김수남 소설가는 절망을 절망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절망 속에서 생의 에너지를 찾았다.

중편 <달바라기>를 1980년에 먼저 쓰고, 이를 확장해 1998년에 장편 <똥구 이야기>를 냈다. <똥구 이야기>는 1990년대 초에 쓴 <동구는 슬퍼도 왕빵만은 먹었다>가 원제고, 먼저 쓴 것이다.

누군가가 뭘 먹는다. 그러면 맨 먼저 본 사람이 먹기! 하고 냅다 소리를 지르는 거다. 그리되면 먹던 사람은 뭐기 됐든 먹던 걸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건 우리끼리 정한 약속이다. <똥구 이야기> 머리 풀기 ‘먹기 하던 날의 분홍’ 중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김수남 소설가에게 이 시절은 아름다운 빛깔로 남았다. 어려웠던 것 자체가 행복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것과 행복한 것은 다른 문제였다. 김수남 소설가는 <똥구 이야기>에서 ‘머리 풀기’라는 이름의 시작 부분에 그때의 빛깔을 늘어놓았다.

김수남 소설가의 자전적 이야기는 자연히 대전의 이야기가 되었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머문 시간은 1년이 안 된다. 대전이 바로 그가 말하는 고향이다. 어린 시절 고향의 모습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기록으로 남았다. 소설은 시간을 가장 생생하고 흥미롭게 기록하는 방법이다. <달바라기>와 <똥구 이야기>에서 대전은 하나의 소재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대전의 삶 자체가 두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큰 축이다.

대전천 근방에 살던 김수남 작가는, 중앙시장 안에서 살다, 원동에서, 문창동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셋방살이로 대흥동을 전전했다. 선화동을 지나 유천동에 자리 잡아, 유천동에서 38년째 살고 있다. 오래 살며 자연스럽게 지역 소설계를 생각하게 되었다. 대전 소설가 협회를 만들어 관여했지만, 결정적으로 대전에 소설가가 별로 없었다. “시는 번뜩이는 감상으로 쓸 수 있지만, 소설은 끈기가 필요해요. 더군다나 장편은요. 충청도적 기질이 소설보다 시가 더 잘 맞는가 봐요. 시로 중앙 문단을 두드리고 알려진 사람은 많은데, 소설에선 없어요.”

오래 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떠들썩하게 등단한 김수남 소설가는 많은 작품을 쓰지는 못했다. 대전 성모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지내며 작품 활동하기 어려웠다.


“전업 작가가 될 용기가 없었어요. 내 가족사와도 연결이 되는데. 아버지가 가정에 성실하지 못한 걸 보고 자랐기 때문에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어요. 그래서 용기를 못 냈죠.”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소설은 늘 곁에 있었다. 두 번째 청까지 거절하고, 세 번째 청을 받아들여 대전일보에 소설을 연재하기로 한 것이 1989년이었다. 장편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려면 절반 정도를 미리 써 놓아야 심리적으로 쫓기지 않는데, 김수남 소설가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두 달 후부터 써달라는 요청에, 정신없이 일 년을 살았다.

“이틀에 한 번씩 열다섯 장을 냈어요. 하루에 일곱 장씩 연재를 했죠. 그놈의 이틀이 왜 이렇게 빨리 오던지. 퇴근하고 오면 졸릴까봐 저녁을 조금만 먹고 열시쯤 돼서 쓰기 시작했어요. 잘 되면 두세 시에 끝냈고, 잘 안 되면 밤을 하얗게 새웠죠. 교사로서도 충실했어요. 그러니 일 년 사이에 많이 늙었어요.”

정신없이 살며 연재한 소설은 <취국(醉國)>, 말 그대로 취한 나라다. 그가 원할 때까지 연재하기로 했던 신문사가 어느 날 연재를 그만해야겠다고 연락해 왔다. 군사정권 성격이 강하던 시절, 여전히 자유롭게 쓰지 못하던 때였다. ‘고주망태가 금주령(禁酒令)을 궁리한다’라는 등 삐딱한 소릴 늘어놓는 <취국(醉國)>에 겁도 났을 것이다.

미완성인 채로 책을 냈다. 완성 짓지 못했지만, <취국(醉國)>은 김수남 소설가가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개작해 놓은 것은 컴퓨터 파일로 저장해 두었다.

“기회가 있으면 <취국(醉國)> 개작한 것을 내고 싶지만, 이제는 새 소설을 계획하고 있어요. 김수남 하면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을 쓰고 싶어요. 역사소설인데, 올봄에는 쓰기 시작해야 해요. 죽을 때가 가까워 오니까 빨리 시작해야죠. 3년 안엔 할 수 있겠지 뭐.”
계획하는 역사소설의 배경은 조선이다. 풀어나가고 싶은 것은 ‘사람 이야기’. 사람이 사람대접 못 받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조선으로 돌려 이야기하고 싶다. 그의 말을 따르면, 대한민국이나 조선이나 ‘도긴개긴’이다.


그가 자신에게 붙인 호는 ‘글보’다. 글 좋아하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란 의미다. ‘글보’라는 호에 김수남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담겼다.
“세상이 바뀔 거라는 생각? 안 바뀌어도 할 수 없지 뭐. 내가 할 도리를 다하는 것뿐이에요. 내가 살아가는 삶에서 의미를 찾는 거죠.”
취한 나라엔 글이 필요하다. 그냥 글이 아니라, 우리가 비틀비틀 지읒자로 걷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게 하는 글이 필요하다. 취한 나라엔 소설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몹시 취했다. 만취에다가 숙취다. 가난이라는 멍에를 벗어던지자말자(이 표현엔 생각해 볼 점이 많지만) 우리는 왜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취해 버렸을까? 돈, 향락, 권력, 뒤틀린 가치관, 시궁창 같은 이념에 취해서 우리는 언제까지 비틀비틀 지읒자로 걸을 것인가? <취국(醉國)> 책 머리에 중

*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김수남 소설가는 <10초 F>(1985), <따라가서 앞지르라>(1993), <유월이 타고 남은 것>(2002)에서 스포츠 세계를 그렸다. 몇 편의 시평과 시집, 수필집 몇 권으로 문학가로서 면모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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