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탄진 거지다리와 넝마주이
신탄진 거지다리와 넝마주이
  • 글 사진 송주홍
  • 승인 2013.04.05 14: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 다리 밑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전에서 17번 국도를 타고 신탄진 방면으로 쭉 들어가면 오른편에 KT&G 한국담배인삼공사가 보인다. 옛날 표현을 빌리자면 전매청인데, 그 전매청 맞은편에 나란히 있는 동네가 덕암동, 석봉동이다. 이 두 동네로 들어가는 초입에 굴다리가 있다. “그 굴다리를 지나 덕암동, 석봉동을 가로질러 쭉 가면 나온다.” 신탄진 거지다리에 대해 아는 건 이게 전부였다. 방법이 없었다. 직접 찾아가보는 수밖에.

아는 정보대로 굴다리를 지났더니 슈퍼가 하나 보였다. 그 슈퍼 앞 공터에 택시가 몇 대 모여 있었다. 자연스럽게 형성한 택시 승강장인 듯 했다. 사전정보라도 얻을까 싶어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던 택시기사들에게 다가갔다.
“이 양반이 뭔 소리 하는 겨? 거지다리 없어진 지가 언젠데 거지다리를 찾어? 다리는 진작 없어졌고, 다리 있던 데가 저 앞에 약국 있는 사거리인데, 사람들이 그 사거리를 지금도 거지다리라고 부르기는 하지”

신탄진 토박이로 신탄진에서 20여 년째 택시를 몰았다는 정광희(66) 기사 말인즉, 굴다리에서 사거리 지나 한국타이어까지 쭉 뻗은 길이 예전엔 하천이었다고 한다.
“계족산 끝자락에서 나와 금강으로 흘러가는 천이었지. 그 천을 기준으로 왼쪽이 덕암동, 오른쪽이 석봉동이었고, 양쪽 왔다 갔다 하던 다리가 거지다리였지. 그러다가 전매청 뒤쪽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 때문에 냄새도 심하고, 교통도 불편하니까 20년 전쯤에 하천을 복개해버렸다고. 그러면서 거지다리도 없어진 겨”

▲ 20여년 전까지 덕암천이 흐르던 곳으로 현재는 복개한 상태다.

난감했다. 거지다리가 없어졌다니. 약국 있는 사거리가 여전히 거지다리로 통용된다고 하니 영 없어진 건 아니지만, 아무튼 실체가 없어진 거다. 이대로 돌아갈까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쉬움이 남았다. 왜 거지다리였는지 정도는 알고 싶었다.
“원래는 그 다리를 망골다리라고 했었어. 그 주변을 망골이라고 불렀었거든. (후에 확인한 사실인데, 그 다리 정식명칭은 덕암교, 하천 명칭은 덕암천이었다.) 근데 언젠가부터 넝마주이들이 그 다리 밑에 살기 시작하더라고.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정도였던 거 같은데? 넝마주이알지? 등에 망태 짊어지고 집게 들고 다니며 폐지 줍던 사람. 걔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그 다리를 거지다리, 거지다리 그렇게 불렀지. 얘들이 거지처럼 생겼었어”

정광희 기사가 기억하는 그들 모습은 거지와 다르지 않았다. 거적때기 같은 옷차림에 머리는 산발, 얼굴이며 손이 새카맸었다고. 연령대는 대략 10대 중후반에서 20대까지 다양했었다고 한다.
“보니까 10대 중반 얘들은 구걸하러 다니고, 10대 후반쯤 하는 얘들은 폐지 주우러 다니는 것 같더라고. 거기에 걔네들 관리하는 오야붕이 하나 있었어. 김천식이라고. 개인적으로 좀 알았었어~ 나보다 두 살인가 많았는데, 비유하자면 ‘거지왕 김춘삼’ 같은 존재였던 거지. 아직 신탄진에 사는 거 같지 아마? 그 사람 찾아봐. 그럼 자세히 말해주지 않겄어?”
맞는 말이었다. 김천식 씨만 만날 수 있다면 끝나는 문제였다. 근데 김천식 씨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처음 찾아간 곳은 덕암주민센터. 이곳에선 별다른 소득을 얻을 수 없었다. 거지다리라면 석봉주민센터 관할이니 그쪽으로 가보라는 말 뿐이었다. 수없이 석봉주민센터에 가보았다. 석봉주민센터에선 색다른 얘기를 하나 전해들을 수 있었다.
“거지다리요? 그러면 ‘재건대’ 얘들 얘기하는 거 같은데? 재건대는 알아서 뭐하시려고요?”

▲ 1970년쯤 거지다리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주인공은 이길성(땅시 나이 18살쯤)씨로 김천식 씨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라고 한다. 거지다리 전체 모습은 아니지만, 현재로선 유일하게 거지다리 모습이 남아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을 통해서 그 당시 넝마주이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석봉주민센터에 따르면 거지다리에 있던 넝마주이들이 재건대 사람이었다는 거다. 그러면서 희망 소식을 하나 더 건넸다.
“이 김천식 씨가 그 김천식 씨가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석봉동에 김천식이라는 분이 한 분 사시기는 하네요. 전화번호는 알려드릴 수 없고, 주소만 알려드릴 테니까 한 번 찾아가보시던가요”
석봉주민센터에서 일러준 김천식 씨는 의외로 거지다리(현 사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반신반의 하는 마음으로 찾아간 김천식 씨 집. 얼굴을 보는 순간, 단 번에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정광희 택시기사 말마따나 김천식 씨에게서 ‘오야붕’ 포스가 진하게 느껴졌다.

‘재건대’는 5.16군사쿠테타 이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인 군정부 시절, 정부가 조직한 단체다. 그 당시 넝마주이들이 이런저런 범죄를 저지르며 시민들에게 피해를 줬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 이들 자활을 목적으로 등록제를 실시하고, 일부 지원금도 주며, 작업구역을 나눠주는 등 재건대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아래는 1966년 9월 5일 재건대 관련 경향신문에 실린 기고문 중 일부다.

부디 우리를 ‘양아치’라고 부르지 말라.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사회인들은 우리를 ‘양아치’, ‘거라시’라고들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중략) 5.16이후 정부는 우리에게서 양아치라는 말을 면해주고 재건대라는 새로운 칭호를 줬다.(중략)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고 사는 우리들이지만 추렁을 메고 나갈 때와 들어올 때는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찬란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중략) 부디 ‘재건대’라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김천식(68) 씨는 “뭐 잘한 일이라고”라며 한사코 입 열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끈질긴 설득 끝에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처음 저 다리 밑으로 들어온 게 1965년 4월이었어. 그 당시 내가 20살이었고, 밑에 있던 얘들이 대여섯 명 정도였는데 걔들이랑 같이 들어왔지.”
사실, 김천식 씨가 재건대 활동을 시작한 건 재건대가 처음 생길 무렵인 1963년이었다. 그때는 중촌동에 있던 재건대 대전지대 소속이었다고 한다.

“거기 있다가 세력 싸움이 나는 바람에 얘들을 몇 데리고 나온 거지. 원래는 서울로 가려고 했었어. 그래서 떠돌아다니며 위쪽으로 올라가다가 충북 부강에서 ‘돼지’(본명 문용남 70)를 만난 겨. 딱 봤는데, 얘가 아편에 중독돼가지고 비리비리한 게 죽기 직전이더라고. 근데 원체가 다부지게 생겼었어.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본 거지. 그래서 일단은 살려놔야겠다 싶어, 아편 끊게 하려고 방에 가둬놓고 뱀 잡아다 먹이면서 겨우 살려놨지.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처먹더라고. 그게 아편 중독 후유증이거든. 그래서 그때부터 돼지라고 했던 겨”

▲ 신탄진 수영장을 관리하던 시절 찍은 사진이다. 왼쪽이 김천식 씨, 오른쪽이 ‘돼지’(문용남 씨)로 대략 이십대 초중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단다. 김천식 씨 뒤쪽으로 신탄진 수영장과 피서객 모습이 살짝 보인다.
그렇게 연을 맺은 ‘돼지’와 얘기가 잘 돼서 65년 4월 서울 가려던 발길을 돌려 다시 신탄진으로 내려오게 됐던 거다. 그것이 재건대 대전 서부지대의 시작이었다.
“실제로는 돼지가 얘들을 관리하고, 나는 대전지대랑 서부지대 왔다 갔다 하면서 총괄했던 거지”

김천식 씨가 신탄진을 주요 활동지로 택했던 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도시로 나가면 먹을 게 없잖아. 근데 막말로 시골은 주변에 먹을 거 투성이거든. 당장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신탄진으로 들어온 겨. 아무 밭에나 가서 감자며 옥수수라도 서리해다가 먹으려고. 처음 자리 잡히기 전까지는 그랬었지. 구걸도 좀 하고…”
먹는 문제도 문제지만, 거지다리 밑에 있던 숙소는 더 가관이었다고 한다.

“씻는 거? 요즘 사람들이야 이해 못하겠지만, 그때는 따로 씻는 게 어디 있어. 여름이나 돼야 대충 하천에서 멱 감는 거지, 겨울에는 생전 씻나? 그만큼 열악했어. 집이라고 해봐야 다리 밑에 교각 있잖아? 그걸 벽 삼고, 다리 상판을 지붕 삼아서 흙벽돌로 대충 지어놨었으니까. 그리고는 중앙시장에서 제일 싸구려 누빈 이불 몇 채 사다가 깔아놓은 게 전부였지”
그렇게 겨우 자리를 잡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폐지사업을 할 수 있었다. 폐지는 주로 2인 1조로 작업했다. 많을 땐 20명 정도까지 함께 했었다고.

“주로 집 나온 얘들, 소년원 같다가 나온 얘들, 길거리에서 노숙하던 사람들이 갈 때 없으니까 들어왔었지. 머물다 가기도 하고, 갔다가 다시 오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렇게 모인 사람이 폐지 주우러 먼 거리는 리어카 끌고 다니고, 가까운 거리는 망태를 짊어지고 다녔다. 하루 동안 모아온 폐지며 재활용품을 다리 밑으로 가져오면 큰 저울에 무게를 달아 장부에 적어놓고, 정산은 매달 한 번씩 했었다. 정부 정리와 얘들 관리가 바로 ‘돼지’의 주 업무였다.

“얘들이 폐지 가져오면 다리 밑에 빼곡하게 모아놓는 거야. 많을 때는 다리 상판에 닿을 정도였어. 그렇게 한 달씩 모아서 넘겨주고 돈 받아오면 얘들한테도 정산해주고 그랬지. 그래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어. 비라도 오면 폐지 다 젖어서 팔아먹지도 못하고, 여름에 물이라도 넘치면 폐지가 다 떠내려가고 난리도 아니었지”

늘 문제는 먹고 사는 데 있었다. 폐지 주어다 팔아서 그 대식구가 먹고 살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택했던 게 바로 신탄진 수영장이었다. 대청댐이 생기며 지금은 없어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신탄진역 뒤편에 신탄진 수영장이 있었다. 여름이면 물놀이 즐기러 오는 피서객이 제법 많아 한때는 신탄진 주요 관광지였다.
“그냥 돈 받기 뭣하니까 돗자리 하나씩 깔아주고 자릿세 받았던 거지. 다 지난 일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먹고 살았어. 피서객 상대로 장사도 하고 하면서”

그 과정이 순탄했던 건 아니다. 기존에 신탄진 수영장을 ‘관리’하던 이들과의 마찰이 불가피했다. 일종의 세력싸움이었던 셈이다.
“신탄진 얘들이 있었을 거 아녀? 걔들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는 외부인이지.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 우리 얘들 맞고 오면 가서 패주고, 또 그러면 그쪽에서 우르르 몰려오고. 그러다가 신탄진 수영장을 우리가 관리하게 된 거지”

그렇게 떵떵거리며 신탄진을 장악(?)했던 재건대 대전 서부지대가 해체한 건 1980년대 중반이다.
“다리에서 나온 건 정확히 1979년 10월이었고, 해체한 건 그 몇 년 뒤지. 1980년대부터 온 도시를 재개발하며 건축 붐이 일었잖아? 나가면 다 돈이었거든. 운전 배워서 버스기사 한다고 나가고, 기술 배워서 공사판 간다고 나가면서 하나 둘 사람이 줄어든 거지. 공사판만 가도 훨씬 많이 버는데 누가 폐지 주우러 다니겠어?”
‘돼지’도 그쯤 결혼을 하고 돈 벌러 간다며 떠났었다. 재건대 대전 서부지대 해체의 결정적 계기였던 듯하다. ‘돼지’와는 그러고 나서 한동안 연락이 끊겼었다고 한다.

“살아 있으면 70살 됐겄네. 나보다 두 살 많았으니까. 20년 전인가? 죽었어. 자살했다고 하더라고. 다리 밑에서 거칠게 살던 사람이 평범하게 가정 꾸리고 산다는 게 쉽진 않았겄지. 그래서 죽은 게 아닐까 싶어…”

1965년. 조그만 하천 다리 밑에 넝마주이들이 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다리를 망골다리 대신 ‘거지다리’라고 불렀다. 십여 년 후, 먹고 살길을 찾아 넝마주이들이 거지다리를 떠났다. ‘오야붕’도 떠나고 ‘돼지’도 떠났다. 그로부터 한참 뒤엔 다리도 없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곳을 거지다리라고 부른다.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충청뉴스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