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예술인 사진작가 신건이
대전 예술인 사진작가 신건이
  • 글 성수진 사진 성기영
  • 승인 2013.04.1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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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사진이어야 한다

한 소년이 우차를 끈다. 우차에는 소년 또래 일곱이 탔다. 멀리서 우차를 발견한 신건이 작가는 우차보다 앞에 서 사진을 찍기 위해 냅다 뛴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우차 끄는 이가 이때 6학년이었댜. 이때가 58년인가 그랬다고. 여기 있는 이들 다 살았댜. 이이가 제주도 민속 박물관에 갔는데 이 사진이 크게 걸려있더래. 전 줄 몰랐는데 동네 사람들이 ‘너 저깄다.’ 했댜. 이이가 시민회관까지 전시를 보러 왔어. 반갑고말고.”

우차를 끄는 소년은 사진 찍혔던 옛일을 잊었지만, 신건이 작가는 사진에 담긴 하루를 생생히 기억한다. 사진은 신건이 작가가 생을 기록하는 방식이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연을 맺는 방법이었다.

▲ 대전 예술인 사진작가 신건이

1934년, 일제가 우리를 강점한 시절의 한복판, 신건이 작가는 공주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다니다 말았으니 졸업장이라고는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사진관을 하셨다. ‘사진장이’라고 불렸지만, 고급 직업이었다.

그때만 해도 형편이 좋은 사람들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신건이 작가는 아버지를 도와 심부름하며 어깨너머로 사진관 일을 배웠고, 열여덟 살에는 직접 사진관 운영을 시작했다. 결혼, 회갑, 돌…. 기쁜 날을 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신건이 작가는 더 넓은 세상을 담고 싶었다.

서른을 한 해 앞둔 1962년 어느 날, 집을 떠나 동학사로 갔다. 결혼해 딸도 있는 상태였지만, 사진을 향한 집념이 다른 무엇보다 앞섰다.

“돈이 있어야 뭐를 하지. 동학사에서 나를 좋게 봐서 기념사진 찍는 촬영권을 줬어. 그거를 주고, 계룡산을 관리해 달라 이거여. 순시도 하고.” 

먹고사는 게 해결이 되니 욕심이 많아졌다. 더 자유롭게 사진 찍고 싶은 마음에 1967년에 충남농촌진흥원 공보 담당으로 들어갔다. 차도 있고, 장비도 좋고, 예산도 많아 자신의 돈을 들이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관광 책자에 들어갈 사진을 찍으러 들로 산으로 안 다닌 곳이 없었다.

‘사진장이’라는 말이 싫어 집을 떠난 이후, 아버지는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라며 신건이 작가에게 등을 돌렸다. 장남인 신건이 작가에게 아버지가 바라는 모습은 거창한 예술가가 아닌, 평범한 맏아들이었다.
“명절에 찾아가면 절도 안 받으셨지.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너는 이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네 동생들만은 그렇게 되면 안 된다.’ 하셨단 말여. 그런데 지금 우리 집안에 예술가가 넷이여.”

“내 별명이 미친놈이었다고. 사진에 미쳤다고 미친놈. 대전서 나 찾으려면 ‘미친놈 어디 갔냐.’ 했다니까.”
카메라 네 대를 넣은, 30kg 가방을 메고 전국 방방곡곡 안 다니는 곳이 없으니 미친놈이란 별명이 따라붙었다. 아는 이들은 미친놈이라 했고, 모르는 이들은 신고를 했다.

시절이 하도 뒤숭숭해서 그런지, 큰 가방을 메고, 마치 총처럼 보이는 삼각대를 들고, 못 씻은 얼굴로 다니는 신건이 작가를 수상하게 보는 이가 많았다.

1960년대 말이었다. “한 번은 대둔산에서 사흘 머물렀거든. 눈이 많이 와서, 그 무거운 카메라를 껴안고 내려오려니, 미끄럼 타고 내려올 수밖에 없는 거야. 사지스봉이라고 청바지 궁뎅이는 다 떨어지고…. 바위 밑에서 자고, 못 씻어서 눈은 쏙 들어갔지, 수염은 났지…. 산에서 내려와 중국집에서 밥 먹는데 순경이 쫓아왔더라니까.”

총을 든 경찰이 쫓아오거나, 군부대가 동원되는 일이 신건이 작가에게는 손에 꼽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금산군지 촬영을 할 때는, 경찰서장과 군수 직인이 찍힌 신분증을 따로 발급받을 정도였다.

“그때 사진 찍던 생각 하면, 지금 찍는 것은 방에서 찍는 거나 마찬가지지. 언제인가 눈 많이 온 날에 계룡산에 사진 찍으러 갔다가, 굴에서 잤거든. 다음 날 아침 눈 떠보니까, 굴 앞까지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있는 거야. 사진이고 뭐고 바로 내려왔지.”

주머니 사정은 언제나 그를 생업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두었다. 1973년부터 오광옵셋 인쇄사에서, 1977년부터는 대왕칼라에서 사진부장으로 지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진이었다. 상을 받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저곳에서 받은 상패가 늘어갔다.

마음이 동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진으로 담았다. 소재는 그저 생활이었다. 산에 가면 산을 찍고, 마을에 가면 마을을 찍었다. 담고 싶은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엄마가 빗자루 장수라서 학교 끝나고 지들이 빗자루 팔러 나온 겨. 한 명은 여 짝, 한 명은 저 짝 손님 오나 보는 거지. 표정이 좋잖아. 한 커트 찍으면 끝나는 거야. 그다음부턴 나를 의식하고 나만 보거든. 이런 표정이 나올 수가 없지.” 발길 닿는 대로, 사진에 담은 생활의 풍경은 역사로, 시대의 생생한 증언으로 남았다.

60년대 말, 70년도 초에 찍은 사진을 주로 모아, 2010년에 <廣亭 申健二 寫眞人生60年>을 냈다.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대전문화재단 후원으로 만든 것이다. 신건이 작가의 인생, 그가 찍어온 사진을 책으로 엮으니, 인간의 생과 사, 희노애락애오욕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름 모를 사람의 인생 중 한 장면이지만, 그렇기에 우리 모두를 대신한다.

사진 속 한 장면에 상여가 나간다. 돼지를 모는 소년이 얼굴을 찌푸린 채 걷는다. 어떤 이들은 밭을 갈고, 경운기를 몰고, 술을 마신다. 강아지를 넣은 천 가방을 든 한 소녀가 버스를 기다린다. 토끼가 풀을 뜯고, 연꽃이 피어난다. 해가 뜨고, 해가 진다.

“안목이 있어야지. 관찰력이 있어야 하고, 인내심도 필요하고…. 아무리 좋은 풍경을 봐도 안목이 없으면 못 담는 거고. 그 모습을 담기 좋은 시간대가 있으면 그 시간에 맞게끔 기다려야 하고, 여건이 안 되면 다시 가야 하고…. 어떤 이는 평생 다니는 사람도 있다니까.”

사진을 찍은 지난 60년을 되돌아보며, 사진작가에게 필요한 것이 안목과 인내심이었다고 말하는 그가 그중 최고로 중요시하는 것은 진실이다.

“사진은 사진이어야 돼. 거짓말하면 안 돼. 포토샵 해서 왜곡하면 안 된다고. 물론 할 수도 있지, 그건 그것대로 작품이고, 사진은 사진대로 둬야지. 둘을 같이 놓으면 안 된다고…. 그런데 요즘에는 어찌 된 게 거짓말하는 법부터 배운다니까….”

사진이 진실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은, 신건이 작가를 60년 동안 오롯한 사진작가로 살게 했다. 사진이 사진다워야 한다는 말에는, 연출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담아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진을 예술로 대해야지 부나 명예를 위하면 안 된다는 의미도 담겼다.

신건이 작가는 단 한 번도, 상을 타기 위해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 진심을 담은 사진에 상은 따라오는 것이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1977년에는 충남미술대전 사진 부문 초대작가 1호로 선정됐다. 명예로운 일이고, 기뻤지만, 명예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진이었다. 사진에 관한 한, 절대로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거나 현실과 타협하는 일이 없었다.

“고집스럽게 내 길을 가고, 남하고 타협도 안 하고 하니까…. 내가 심사위원 하면 난리가 나지. 재심하고, 다 뒤집어 놓으니까…. 그래서 나는 잘 안 찾아.”

언젠가부터 신건이 작가는 사진을 찍으러 다닐 때 제자라고 할 수 있는, 후배들을 데리고 다녔다. 자신이 알려줄 수 있는 데까지는 어떤 것이라도 알려주고자 했다. 제자들에게 애착이 많았지만, 엄격하기로도 유명했다. 함께 출사 떠나기로 한 시각에 늦으면 가차 없이 먼저 떠났고, 좋은 사진을 찍을 때까지 악평이 섞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배움이 짧아 아쉬웠던 점을 후배들은 느끼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었다. 그의 노력이 고마웠던 제자들은 아직까지도 연락을 해온다.

자신에게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사진이지만, 자신을 떠나면 부질없어지기도 한다는 걸 신건이 작가는 알고 있다. 한동안 몸이 안 좋았을 때, 그는 자신의 오랜 시간이 담긴 흔적을 정리했다.

“아무리 좋은 거 찍었어도 죽으면 그만이지. 그거 어떡할 겨. 어디다 남겨 놓지를 못하면 쓰레기로 다 가는 거지. 본인 죽으면 쓰레기 되는 거지. 작품이 뭔 줄 아나. 93년도에 다 정리했어. 회사 그만두고 사진 연구소 시작했는데 잘 안 됐어. 건강도 안 좋고…. 그래서 골동품 카메라도 기증하고. 사진도 다 정리했지. 차로 한 짝 실어갔어….”

4천6백 장의 사진은 정리해 <신건이 한국사랑>이라는 이름으로 CD 사진집을 냈다. 그때만 해도 사진작가로서의 인생이 더 길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지금은 건강하지. 사진을 찍으면 마음이 좋으니까…. 좋은 것 보면서 돌아다니고, 사진 찍으면 남들한테 주고 싶은 마음도 들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지….”

“후회는 없어. 사진 찍는 게 워낙 즐거우니까. 다만, 크게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크게 못 그린 것뿐이지. 세계 10대 불가사의를 찍고 싶었는데, 조금 찍다가 몸도 아프고 돈도 떨어지고 하면서 못했어. 그건 아쉽지. 돈이 없어서 이제는 못해.”

세계 10대 불가사의를 담고 싶던 꿈은 어쩔 수 없이 포기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두고, 조그만 카메라를 들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지금 생활이 신건이 작가는 마음에 든다. 사진작가로 이름을 날리며, 후진양성에 신경을 쓰면서부터, 자신의 사진에는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 초연한 지금, 조금 더 넉넉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다.

“대천 가고 싶으면 7시 50분에 서대전역에 대천 가는 게 있어. 왕복하면 만 원 정도 되고, 칼국수 한 그릇에 오천 원. 만 오천 원이면 여기서 대천까지 다녀. 군산, 선유도 이런 데도 이만 원만 넣고 가면 충분해. 이제 내 맘대로 찍는 거 아녀. 제자들이랑 다녔을 때랑은 다르지.”

개인전 열두 번, 작품집 두 권, 4천8백 장의 사진이 담긴 CD 사진집…. 그동안 수많은 지면과 전시장에 사진을 발표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을 좋아하고 인정하는 것에 “워낙에 많이 찍었으니까….”라는 이유를 다는 신건이 작가. 지금도 한해 초대전에 초대되는 작품이 30점이다.

여전히 자신과 자신의 사진을 기억하고 좋아하는 이들이 신건이 작가는 고맙다. 30kg이 넘는 가방을 짊어지고 다닌 한 평생…. 인공 연골 수술까지 받고, 이제는 작은 카메라 한 대만 품 안에 넣고 길을 떠난다.

“여행이지 뭐. 어디 발표하려고 다니는 건 아니야. 그런데 또 기회가 있다면 하는 거지. 그게 금방 되나. 계속 이것저것 보고 다녀야지…. 단, 무명초 사진은 모아서 한번 전시하고 싶어. 어린 애들 사진하고….”
화려하지도 않고 이름도 없어 많은 이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무명초이지만, 신건이 작가에게 무명초는 특별한 소재다.

그리고 이 무명초는 신건이 작가가 추구한 사진 세계와도 닮았다. 다른 욕심 부리지 않고, 오직 사진만을 위한 사진, 꾸밈없는 진실만을 담은 사진…. 신건이 작가는 사진을 담고, 사진은 신건이 작가를 담고…. 60년 찍은 사진이 이제는, 신건이 작가의 얼굴에 담겼다. 넉넉한 듯 고집스럽고, 고집스러운 듯 푸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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