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예술인 음악인 노덕일
대전 예술인 음악인 노덕일
  • 글 성수진 사진 성기영
  • 승인 2013.05.0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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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음악 속에 산다

“언제부턴가 저는 나이 얘기를 안 하려고 해요. 학교 정년퇴임 하고 한참 지난 선배가, 이제 노인정에 나가볼까 해서 갔더니, 자기가 제일 어리더라는 거예요. 70인데도, 나이 얘기를 할 수가 없더라…. 그것이 인생이 아닌가….”

살아온 시간쯤은, 다른 오랜 인생 앞에 맥을 못 추고 말지만,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노덕일 음악가가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은 음악과 함께 즐거운 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언제나 함께였던 음악은 노덕일 음악가에게 공기나 물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어머니 뱃속부터 베토벤과 함께
“지나고 보니, 인생에서 잘한 것 중 하나가 음악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하셔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을 들었어요. 어머니가 음악으로 태교를 한 셈이에요.”
▲ 대전 예술인 음악인 노덕일
1939년 태어난 노덕일 음악가는 대전 토박이다. 일제강점의 격동기 속에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한 것 없이 지냈다. 대전시에 피아노와 전축이 몇 대 없던 시절, 노덕일 음악가는 미제 제니스 전축으로 음악을 들었다. 음악에 관심이 많던 아버지 덕분이었다. 대전 KBS 방송국에서 레코드판을 빌려 갈 정도였으니, 노덕일 음악가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한 것이라면 모르는 게 없었다. 음악에 관해서는 학교에서 선생님보다 나았고 ‘음악 박사’라고 불릴 만큼이었다.

“6.25가 나고 아버지는 부산에 피난 갔고, 어머니랑 4남매는 그 당시 대덕군으로 피난을 갔어요. 집 대문에 엑스자로 판자를 붙여 못질을 하고 갔어요. 전쟁터에 못질하면 뭐하겠어. 레코드판이니 전축이니 남들이 다 가져갔지….”

6.25가 나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음악을 듣지 못했지만, 음악은 노덕일 음악가 몸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동네 고등학생 형이 부는 클라리넷 소리에 이끌려 무작정 형에게 불어보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이 본격적인 음악 인생의 시작이었다.

“남들은 불기 어려워하는 걸 한 번에 불었어요. 형이 잘한다며 클라리넷을 가르쳐 줬어요. 그 형이 학교에서 클라리넷을 가져온 날에 가서 배웠어요. 그렇게 배워서 대전공고에 특기장학생으로 들어갔어요.”

고등학생이 되고 클라리넷을 심층적으로 배웠다. 군악대에서 제대한 3학년 형이 개인지도를 해줬다. ‘니 잘하는구만 기래.’ 북한에서 온 형의 말투는 아직도 생생하다.

음악 인생을 만든 한 번의 시험
대전고등학교, 대전공업고등학교, 대전사범학교. 대전에 밴드부가 셋이던 시절이었다. 대전고등학교 밴드부가 연주를 제일 잘했지만, ‘클라리넷 연주는 노덕일이 제일 잘한다.’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학교나 동네에서, ‘노덕일이라면 서울대에 갈 실력’이라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부산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벌인 사업이 잘되지 않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대학 입학을 꿈꿀 수 없었다. 그러다 공군 군악대 행정병이던 선배의 한 마디가 또 노덕일 음악가의 음악 인생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서울에서 공군교향악단을 모집한다는 말에, 실기 시험을 봐 1959년, 공군교향악단 단원이 되었다.

“전쟁 끝나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특수계층 아니면 취미 활동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런 이들에게 군악대가 있었어요. 군악대가 연주를 하면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왔어요. 군악대가 마치 스타 같던 때였죠.”

2, 3년쯤 군악대에서 연주하다 보니 더 배워야겠다는 욕심이 났다. 마침, 공군본부에 우수한 사람에게 장학금을 주어 대학에 보내는 제도가 있어 서라벌예술대학 음악과에 합격했다. 군악대 단원으로서 업무를 마치고 야간 대학에 다녔다. 전체 부대 2~30명에게만 주어지는 특별대우는 군용차를 타고 등교하는 것에까지 이어졌다.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가지고 군악대에서 연주하니 이론과 실기에 모두 강했죠. 군악대 생활은 재미있었고, 내 인생 중 잘한 것이라 생각하는 몇 가지 중 하나예요.”

공군교향악단 단원으로 7, 8년 활동한 후, 부지휘자로 지내다, 1973년, 대전공군교육사령부에 군악대장으로 발령이 났다. 고향에서 음악을 하며 지내게 된 것이다.

노덕일 음악가는 1973년, 한국관악협회를 만드는 데 직접 관여했다. 관악인을 하나로 잇는 단체가 필요했고 여럿이 힘을 모아 한국관악협회를 창립했다. 창립 기념으로 일본 대표 관악단을 초청했다.

“그때 일본에서 고등학교 선발팀이 왔는데, 제가 군악대장으로 있으면서도 군악대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잘하는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 팀보다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일본관악협회장한테 당신들과 교류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때부터 일본 호쿠리쿠와 충남이 자매결연을 맺고 관악으로 교류했다. 우리 관악보다 30년은 더 앞서던 일본 관악과 교류하며 부족한 곳을 채웠다. 그러니 1976년부터 지금까지 관악 대회에서 대전, 충남이 1등을 놓친 적이 없다.

일본과 교류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음악의 힘도 직접 느꼈다. 관악으로 교류했지만, 사람과의 추억이 쌓여갔다.

“1978년에 일본 지휘자 이마카와 도루의 일본 집에 갔어요. 마당에 몇백 년 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 앞 팻말에 ‘대전 땅’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1974년에 대전고등학교 강당에서 초청 연주했을 때 비닐에 가져간 흙이었어요. 또, 이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아리랑이라고 해요. 제가 일본에서 지휘할 때 이 사람이 아리랑을 불렀어요.”

1992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가 심각했을 때였다. 노덕일 음악가는 교사들, 학생들과 함께 일본에 가기로 한 일정을 취소했다. 일본 측에 전화로 이야기하니 일본 관계자가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건너왔다.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를 인식한 일본 관계자는 일본으로 돌아가 역사를 왜곡한 교과서를 쓰지 말자는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호쿠리쿠 지역 학교는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채택하지 않았다. 음악 교류가, 국가적 사안에 힘을 쓰기도 한 것이다.

공군교향악단 단원으로 연주하며, 여러 타이틀을 함께 지녔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 KBS 방송 관현악단에서, 1962년에서 1964년까지 한국교향악단에서 활동했다. 또, 밤무대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며 돈도 벌었다.

“지금은 고인인 전국노래자랑의 김인협 악단장 하고 서울에서 같이 무대에 섰어요. 미 8군 부대에서도 연주했고요. 내 행운은, 뽕짝부터 베토벤까지 두루 경험한 거예요. 지도자가 되고 나서 도움이 되더라고요.”

1978년까지 군악대장을 했으니, 군악대 생활을 20년 가까이 했다. 그 자리에서 내려와서는 사업을 시작했다. 가구점을 운영하면서 한창 돈이 모이기 시작할 때, 충일여자고등학교 교장이 함께 일하자며 찾아왔다.

“당시에는 으스대면서 안 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몇 번을 찾아와서 원하는 걸 해주겠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나팔을 사달라고 해서 학교에 30대를 구비했어요.”

충일여자고등학교에서 5년쯤 근무하자 이번에는 공립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 특채로 교사가 되었다. 여러 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지내고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 계룡시의 용남고등학교다. 음악 교사로 지내며 학생들에게 음악이 뭔지 직접 들려주려고 노력했다. 1년에 한두 번씩은 학교 행사에, 특별 음악회에 군악대를 초청했다. 그동안 학생들이 교과서로, 테이프로 접하던 음악을 직접 들려주며 음악이 무엇인지 알게 했다.

“만약 음악, 미술을 모르면 어떤 재미로 살까, 혼자 그런 생각을 해요. 학생들에게도, 영어, 수학도 중요하지만 다른 것도 있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아무런 취미 없이 살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대한민국 관악경연대회, 전국학생 문화음악경연대회, 충남 청소년 취주교향악단, 충남 교사 관악 합주단, 윈드 오케스트라 등 여러 단체를 만들고 지도했지만, 가장 마음에 남는 일은 충남관악단 희망울림을 지도한 것이다.

“2004년 여름에, 충남 남부 장애인 복지관에서 찾아와서 자기들이 관악 할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들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고 할 수 있다고 말했죠. 그리고 2005년에 단원을 선발해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그때 가서 보고 놀랐어요. 장애 정도가 생각보다 심했어요. 그래도 한 번 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서른 명 중에 악기 들 수 있는 이들을 단원으로 뽑았어요.”

열심히 연습해 희망울림 단원들은 점차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무대에 섰다. 이들의 음악이 변화시키는 것은 이들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듣는 모든 이였다.

“무대 위에서 눈물을 흘린 건 희망울림 지휘했을 때가 처음이었어요. 단원들이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그 애들 연주하는 걸 보면 관중도 울어요.”

노덕일 음악가는 음악을 듣고 감동할 수 있는 사람, 진심으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음악 하는 사람 중에 악인은 없다고….

“악한 사람은 음악 못 해요. 할 수가 없어요. 그런 정신적인 면을 어머니한테 받았다고 생각해요. 초등학교 1학년 땐가, 우리 집에 나만한 거지 셋이 밥 동냥을 왔어요. 어머니가 들어오라고 해서 저랑 같이 먹으라고 밥을 차려 줬어요. 께름칙한 마음에 안 먹겠다고 했는데, 어머니가 ‘사람은 다 똑같은 거야.’ 하면서, 밥 먹는 동안에 동냥 깡통을 닦아 주셨던 기억이 나요. 인정이 많은 분이었어요.”

중구 관악 합주단의 지휘자로, 충남관악단 희망울림의 지휘자로, 중구문화원 부원장으로 지내는 요즘 하루는 여전히 바쁘다. 많다고 으스댈 나이는 아니지만, 제자리를 지키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인 것을 실감한다.

“내 나이가 이제 물려줘야 하는 나이예요. 제자들, 후배들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줘야 해요. 내가 흙이 되어야지요. 작년에 대만 콩쿠르 심사를 갔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로버트 스미스가 밴드 지도하는 모습을 보고, 안 되겠다 싶었어요. 세계 각국 지도 방법을 터득해서 전파하는 게 최종 목표예요.”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뒷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음악의 정의다.

“6년 전인가, 시 낭송회에 갔어요. 시가 음악인 걸 그때 알았어요. 그림에도 음악이 있고, 모든 것에 음악이 있더라고요. 밤과 낮에도, 초승달, 보름달에도 모두 리듬이 있더라고요. 모든 게 다 끝나면 음악 속에 살고 싶어요. 음악을 통해 살고 싶어요.”

그동안 해온 연주와 지휘, 각종 대회 심사는 횟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일상적인 일이었다. 숨을 쉬는 일, 밥을 먹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스스로 음악인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관악기와 음악과 함께한 인생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음악과 함께일 거라는 노덕일 음악가. 나직이 읊조리는 말에도 ‘음악’이란 단어가 들어 있다.

다 끝나면 음악 속에 살리라. 자연도 음악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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