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예술인 나비의 몸짓으로, 꽃이 피어나듯 무용가 조광자
대전 예술인 나비의 몸짓으로, 꽃이 피어나듯 무용가 조광자
  • 글 성수진 사진 성기영
  • 승인 2013.08.0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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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꽃이…. 인간 꽃이 최고 예쁜 거지. 무용이 뭐 딴 거간?”

“손을 뻗어서 새가 소나무 가지에 살며시 앉는 모습을 나타내 보세요…. 두 손을 싸서 보면 얼굴은 꽃송이요. 손바닥과 손등은 꽃잎의 안쪽, 바깥쪽이요. 발을 돌리면 땅에 뻗어 가는 뿌리의 느낌을 받고, 호흡을 주면 날아가는 느낌도 받고요….”

조광자 무용가는 춤을 출 때면 시인이 된다. 조광자 무용가의 몸짓을 말로 풀어내면 그게 바로 시고, 춤사위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하는 말도 시다. 그녀의 언어를 젊은 사람들은 쉬이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이 무엇인지에 조금이라도 눈 뜬 사람들만이 그 언어를 공유할 수 있다.

▲ 대전 예술인 나비의 몸짓으로, 꽃이 피어나듯 무용가 조광자
한 마리 어린 나비였던 시절 조광자 무용가는 1945년, 해방둥이로 대흥동에서 태어났다. 대흥동에서 인동, 그리고 원동으로, 다시 대흥동으로 옮겨 다닌 어린 시절. 그때는 몰랐지만, 무용가로서의 모습은 그때부터 싹 텄다.

“어려서부터 명절이면 할머니가 치마저고리를 해 입혔어요. 동네에 인사도 다니고, 너풀거리고 돌아다니면 동네 어른들이 나비 같다고 했어요. 무용이란 말이 어설픈 시절이었어요. 그때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춤과 연결된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장날 대전역 앞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생선장수, 엿장수, 약장수, 각설이들이 한데 모인 그곳은 춤판이나 다름없었다.

“장에서 본 것들이 춤추는 데 도움이 됐지요. 잠방이에다가 포대 자루 하나 가지고 음식 주면 음식 받고, 돈 주면 돈 받는 각설이들 모습, 깡통 치면서 구성지게 노래하는 그 모습을 빠져서 봤었지요.”

▲ 대전 예술인 나비의 몸짓으로, 꽃이 피어나듯 무용가 조광자
춤이 뭔지, 무용이 뭔지 인지하지 못한 초등학생 시절, 비교적 어려움 없이 자란 탓에, 치마저고리가 있다는 이유로 학예회 무대에 섰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중학생 때도 무용 선생님 눈에 들었다. 한밭여자중학교에, 대전여자고등학교에 다니며 계속 무용이라는 끈을 놓지 않았다. 그때 자신을 키워준 고마우신 선생님들 이름 석 자는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 배우며 고등학교 졸업 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여차여차해 대학교에 진학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학교 선생님 권유를 따라, 이미라 무용가에게 무용을 배웠다. 그 뒤 자연스럽게 이미라 무용가의 무대에 가끔 나가다, 조교를 하게 됐다.

 아마 대학교에서라면, 그렇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없었을 거라고 조광자 무용가는 말한다.
“64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요. 65년에 신인예술경연대회 무용 부문에 나가면서, 이미라 선생님이 역사의 춤을 가르쳐 주셨어요. <유관순>이라는 작품을 서울 명동극장에서 하는데 사람들이 놀랐죠. 대전에서 역사를 가지고 춤을 췄다고요. 저는 그때 입상했고요.”

이미라 무용가를 따라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귀신 춤을 추며, 자신이 무당이 될까 무서워한 기억도 다양한 경험 속에 자리 잡았다.

“이미라 선생님이 민속경연대회 나가면서, 부여에 가서 은산 별신굿이 생긴 유래를 춤으로 엮어서 행했어요. 선생님은 안무하시고, 저는 아이들 지도하고 같이 춤추고 했어요. 야광 가루를 뼈 모양으로 타이즈에 붙여 밤에 춤을 추니까 완전히 귀신이었죠. 나중에는 무당이 될까 무섭더라고요. 60년대 얘기예요.”

훌륭하신 아버지 밑에서 배운 것 이미라 무용가의 조교를 5년쯤 하다, 1969년, 자신의 이름으로 무용 연구소를 만들었다. 그것이 나중에는 학원이 되었다.

조광자 무용가의 무용가로서의 삶은, 학생들 교육과 함께 이어졌다. 세월이 지나며 이제는 각자 위치에서 자리를 확실히 잡은 제자들을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그때는 그동안에 다 못했던 걸 아이들한테만 쏟았어요. 토요일, 일요일도 없었어요. 무조건 도시락 두 개를 싸서 나왔죠.”

재능은 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쉽게 무용을 배우지 못하는 학생들 지도도 열심히 했다. 그럴 때면 고등학생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장사 하시면서 교육을 중시했던 분이에요. 점원을 항상 가정 형편이 어렵고 똘똘한 사람으로 뽑았어요. 야간 학교에 보내주고, 공부를 더 괜찮게 한다 싶으면 주간 학교에도 보내줬고요.”

학생들 가르치며 자신의 목마름을 깨닫고 자신 역시도 강습에 다녔다. 그리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이화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한국무용을 3년 수료했다. “이미라 선생님 밑에서 창작 무용을 익히고, 서울 다니면서 전통 무용을 익혔어요. 그리고 애들 가르치면서 여러 춤을 파악했어요. 학생들한테 현대 무용, 발레, 우리나라 춤, 농악까지, 많은 걸 다 가르쳤어요.

유연성 많은 아이는 현대 무용을, 발목이나 목선이 예쁘고 테크닉 좋은 애들은 발레, 쪽을 지어서 맵시가 예쁘면 전통 무용, 재주와 입담이 좋으면 창작 무용을 시켰어요. 그러다 보니 내 주제가 하나도 없는 거여….”

농악과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 어린 시절, 각설이들이 깡통을 치던 그 가락을 잊지 못한 조광자 무용가는 장구에 매력을 느꼈다. 농악 하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배우고, 혼자 녹음테이프를 들어가며 연습하기도 했다. 1970년, 조광자 무용단을 만들며 함께 어린이 농악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충무공 탄신기념 온양축제에 13년쯤 참여했다.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추억처럼 이야깃거리도 만들어졌다.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가 이충무공 행사에서 어린이들이 농악 하는 걸 호텔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보고 계시더라고요. 그때 사진 안 찍어 놓은 게 아쉬워요.”

어린이 농악단을 계기로, 금산농업고등학교나 유성농업고등학교 등에서 농악을 가르쳤다. 88 올림픽 때, 유성농업고등학교, 충남대학교 체육과 학생들과 서울과 대전을 오 다니며 웃다리 농악으로 공연한 것은 특별한 추억이다.

무용에 더 집중해야겠다 싶어서 농악을 마지막으로 한 곳은 대전 소년원이다. 한 주에 한 번 토요일, 6년 정도, 대전 소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연주하며 꽹가리를 깨트리고, 장구를 찢을 정도로 마음 속 응어리진 게 많은 아이들이었다.

“처음 가르칠 때는 교도관들이 뺑 둘러싼 가운데서 했어요. 그런데 제가 교도관분들께 너무 그렇게 하지 말고, 한분만 계시고 자유롭게 하게 해달라고 했어요. 애들과 같이 재밌게 놀았죠. 행사 있는 날엔 애들 잠깐 데리고 나와서 세상 구경도 시켜주고….” 그때 법무부장관 표창, 소년원 감사패 등을 받았지만, 조광자 무용가는 그런 것보다 중한 것은 애들과 함께하는 날이 즐거웠던 것이라 말한다.

소년원 가는 날은 정말 즐거웠어요. 2년 동안 연말에 일일 엄마를 한 것도 기억에 남네요. 아이들과 손잡고 강강술래도 하고…. 자기 더 예뻐해 달라고 서로 싸우던 모습이 기억나요.”

춤으로 반짝 빛났던 순간 “애들 데리고 많은 작품을 했지만, <흙 위에 핀 연화>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연화부수를 무용에서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흙 위에 핀 연화>를 생각했어요. 대청댐 생기면서 수몰된 마을, 그 수몰민들 애환을 담았어요.” 백 명이 넘는 출연진, 무대 연출 등 많은 점에서 스스로 되돌아 볼만 하지만, 가장 마음이 좋았던 이유는 민속을 무용화한 것에 있었다.

“요즘 너무 새것만 추구하잖아요. 우리 것이 자꾸 없어지니까, 없어지는 걸 살리고 싶어요. 사람들이 그걸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대전을 문화의 불모지라고 하니까 속상해요. 그저 ‘선비 선비’ 하시는데, 선비는 마음을 다스릴 줄 알거든요. 모든 춤을 다스릴 수 있는 게 우리지역이에요.”

살풀이를 많이 춘 탓에, 사람들이 흔히 조광자 무용가 하면 살풀이를 떠올리지만,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선비의 고장에서 태어난 덕분인지 조광자 무용가가 추지 못하는 춤이란 없다. 그리고 조광자 무용가에게 무대가 될 수 없는 곳 또한 없다. “바윗덩어리 위에서면 어뗘. 눈 위면 또 어뗘. 춤추는 사람 맘이지. 그런 걸 가리면 춤추지 말아야지….”

웃는 얼굴로 춤을 추면 꽃이 핀다 주부들을 가르친 지도 25년 정도가 됐다. 쉰에 함께하기 시작한 제자가 일흔이 되는 걸 보는 마음은 복잡 미묘하다. “한 학생분이 춤추는 게 좋다고 ‘선생님, 우리 천국 가서도 만나요.’ 하더라고요. ‘먼저 가는 사람이 먼저 자리 잡읍시다.’ 했지요. 그런데 이제 가시는 분들이 생기더라고요….” 춤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겼다. 인생을 이루는 한 부분, 어떠한 행복, 불행도 춤으로 담지 못할 것은 없다. 그래서인지 춤만큼 아름다운 게 없다고 조광자 무용가는 말한다.

항상 웃으면서 춤추라고 해요. 입꼬리를 올리고 춤을 추면 꽃이 펴요. 인간 꽃이…. 인간 꽃이 최고 예쁜 거지. 무용이 뭐 딴 거간?” 평생 춤을 췄지만, 사실 무용은 그리 별스러운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자신의 무용 인생을 검증이라도 해주는 듯한, 많은 상과 표창…. 그런 것들은 조광자 무용가가 춤을 추며 느끼는 즐거움에 비교하면 그 의미를 잃고 만다.

강의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대전춤사랑회로 활동하며 춤추는 것이 조광자 무용가에게 그저 즐거운 하루다. “내가 즐거우면 그만이에요. 몸 아프기 전까지 춤춰야지요. 앞날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 건강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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