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만나다_무궁화 백화점
공간을 만나다_무궁화 백화점
  • 글 사진 이수연
  • 승인 2013.08.23 16: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간판 말고도 있다
무궁화 백화점 외관에 덕지덕지 붙은 간판을 보면, 어린 시절 장롱에 마구잡이로 붙여 놓았던 스티커가 떠오른다. 스티커만 손에 쥐어 주면 엄마가 허락한 공간(주로 장롱문)에 다 붙여놓곤 했다. 뗄 수도 없이 더덕더덕 붙였던 스티커와 무궁화 백화점의 간판은 많이 닮아 있었다.

공간마다 주인이 있다
“아니, 아가씨? 뭐 배우러 왔어?”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무궁화 백화점 3층, 무궁화 카바레 앞을 서성이다 만난 남자였다. 우물쭈물 거리자 선생님을 소개해주겠다며 무궁화 카바레 안으로 안내했다.

오후 다섯 시, 무궁화 카바레 안에는 세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가 있었다.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이 댄스홀이다. 그 오른쪽에는 부엌으로 보이는 곳이 있다. 사람들이 부엌에 놓인 동그란 탁자 위에 맥주와 안주를 놓고 먹고 있다. 한바탕 수업을 치른 후인지 댄스홀 안엔 아무도 없다. 남자가 등을 떠밀며 ‘선생’을 불렀다.

남자가 부른 ‘선생’은 40대로 추정되는 여자였다. 여자는 “가르치는 사람은 나뿐이고, 이곳은 주로 노는 곳”이라며 “주로 나이 드신 분이 배우는 곳이니 뻣뻣한 몸을 푸는 것은 학원을 찾아 가보라.”라며 웃었다.
무궁화 카바레는 지금도 무궁화백화점에서 객이 많은 곳 중 하나였다.

1980년 3월 6일 설립한 무궁화 백화점은 당시 대전에서 가장 큰 복합쇼핑몰이었다. 현재 무궁화 카바레가 있는 3층은 예식장이었다. 2층은 의류판매점이 있었다. 무궁화 백화점이 생기고 2년 뒤인 1982년, 지금 갤러리아 동백점 자리에 동양백화점이 들어섰다. 바로 큰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워낙 복합 쇼핑몰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였다.

현재는 들어선 점포마다 주인이 다르지만, 처음에는 건물주가 따로 있었다. 그때 건물주는 무궁화 백화점에 들어온 상인에게 받은 임대료로 다른 사업을 하다 실패했다. 사업 실패 후 무궁화 백화점이 경매로 넘어갔고, 각 점포에 들어선 상인이 경매에서 점포를 얻었다. 그래서 현재 무궁화 백화점은 아파트처럼 각 호마다 주인이 다르다.

빈 것이나 다름없지만, 사람도 있다
무궁화 백화점이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은 것은 방송국이 떠나고 관공서가 떠난 것도 한몫했다. 설상가상으로 가까운 곳에 1996년 세이백화점이 생겼고, 이후 홈플러스까지 세워졌다. 무궁화 백화점 지하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는 한상태(64) 씨는 부도 당시 노래방 자리를 산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

“문 닫아놓고 노가다 할 때도 있어요. 영업도 안 되는데 교통유발부담금 내라고 찾아오고, 힘들어 죽겠어요. 마누라는 병원에 있고, 이렇게 어렵게 사는 사람이 참 많은 걸 알아야 해요.”

노래방이나 의류코너는 무궁화 백화점 내에서 거의 영업이 되지 않았다. 2층에 있던 의류판매점이 1층으로 내려오고, 2층에는 지금 헬스장과 전당포, 미용실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헬스장은 지금 자리에 들어온 지 10년 정도다. 관리인인 김인근(61) 씨는 “이전에 의류판매점이 내려가고, 유도학원도 했다가 업종이 많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 층에 250평 정도인데, 헬스장은 128평이다. 그나마 회원이 꽤 돼서 관리인을 두고, 운영이 가능하다.

헬스장과 같은 층인 미용실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를 비웠으니 연락해주세요.”라는 메모를 남긴 채 문을 닫았다. 전당포는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낮잠을 즐기는 아주머니를 볼 수 있었다. 많은 점포가 문을 열어놓고 쉬거나, 문을 닫고 아예 영업하지 않고 있었다. 건물을 빙 둘러싸고 빈틈없이 간판은 붙어 있는데, 막상 안은 휑한 기운만 불었다. 1층을 점포를 돌아다니다 아리랑 우표사를 발견했다.

“나도 가끔만 나와. 문 열었다 닫았다 하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1층은 거의 장사를 하지 않는다고 봐야지. 빈 곳을 문구점에서 다 짐으로 채워놔서 꽤 차 보이는 것일 뿐이지. 문구점 짐을 다 빼면 사실상 다 빈 것이나 다름없어.”

미처 알지 못했던 옛이야기도 있다
1층 점포에서 우표사를 운영하는 박선규 할아버지는 무궁화 백화점 내에 자리한 지 20년 정도 됐다. 교사였던 박선규 할아버지에게 ‘수집’은 어린 시절부터 유일하게 가진 취미였다. 6.25 전쟁 후 미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화폐가 바뀌고 난 후라 집집이 엽전이 참 많이 돌아다녔다. 엽전을 화폐로 쓰던 시절이 아니기에 집마다 남아도는 엽전으로 엿을 바꿔 먹거나 엽전을 신기해하던 미군에게 싼값에 팔곤 했다.

제기차기의 시작도 그때부터라고 박선규 할아버지는 말한다. 종이에 엽전을 싸서 가운데 구멍을 뚫고 종이를 다시 빼 끝을 여러 갈래로 찢어 너풀거리게 하며 놀았던 것이 엽전 제기차기의 시작이었다. 그때 초등학생이었던 박선규 할아버지도 집에 많았던 엽전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이 수집의 시작이었다.

자라면서도 꾸준히 무언가를 모았다. 그것은 우표이기도 했고, 동전이기도 했고, 광고지나 문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으는 것을 취미로 즐기다 이후 우표사를 열었다. 1974년 중앙데파트에서 우표사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우표사는 아이들 상대로 하는 장사였다. 지금이야 뭐든 넘치는 세상이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귀히 여겨지던 때였다. 어려웠던 시절을 추억하며 박선규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빵계’였다.

“요즘 애들 대학원 나왔어도 그건 몰라. 옛날 구로공단에 전국에서 처자들이 다 모였단 말이야. 시골 아가씨들이 무조건 공장에 나와서 일을 했어. 그런데 공장에서 저녁을 먹이고 또 일을 시킨단 말이야. 그러면 일하는 도중에 꼭 빵이 하나씩 나왔어. 그런데 얘들이 그걸 먹지를 못해. 나는 밥도 먹고 배가 부른데 집에 가져다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거야. 그런데 하나씩은 보내지를 못하니까 삼십 명씩 모여서 순서를 정해. 그리고 순서에 맞게 하루에 한 집 씩 보내는 거지. 그럼 한 달에 한 번씩 고향 집에서는 그 빵 서른 개를 가지고 잔치를 하는 거야. 그걸 빵계라고 했어.”

▲ 아리랑 우표사 박선규 할아버지

사람 사는 정도 함께 있다
한참 할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다가 무궁화백화점 안에서 가장 오래 점포를 운영했다는 무궁화 도매마트로 갔다. 사장 내외의 말에 따르면, 무궁화 백화점은 무궁화처럼 오래도록 피어나라고 지은 이름이다. 이제 막 30년이 된 슈퍼는 처음에는 직원을 두고 운영할 정도로 바빴다. 지금은 사장 내외만 가게를 지킨다.

오랜 시간 양심적으로 물건을 팔고, 아파트가 들어올 때 시설투자도 했다. 그래서인지 손님이 좀 있다. 사장 내외는 내년까지만 하고 시골로 내려갈 생각이다. 이제 자식들 다 키웠으니 둘이서 시골에 내려가 편안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서 있던 계산대에 ‘채소는 시장에 가서 사세요.’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바로 옆에 시장 있는데 뭐 하러 그런 걸 팔아~ 다 할머니들 나와서 장사하시니까 우린 처음 가게 생겼을 때부터 그런 거 안 팔았어. 콩나물도 안파는 슈퍼는 우리 밖에 없을 거야.”

▲ 무궁화 도매마트 김영하 사장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충청뉴스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