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사람들_인동상회 임달순 씨
인동사람들_인동상회 임달순 씨
  • 글 사진 이용원
  • 승인 2013.10.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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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사람들’은 소자서전입니다. 이땅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낸 그 질곡의 시대를 기록하는 것에 의미를 둡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출간한 ‘민중자서전’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이 적은 지면에 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진행하는 것은 또다른 시작을 위해서입니다. 이미 앞서 두 차례 진행했고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주관적 판단으로 생길지 모를 왜곡을 우려해 최대한 담담하게 기록하려 노력했습니다. 억눌렀던 감상은 에필로그에 담았습니다.
그곳에서, 산중 작은 암자를 만났다

임달순(83) 씨가 태어난 곳은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다. 임씨 집성촌인 그곳에서 1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궁핍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한 차례 일본에 다녀온 아버지는 임달순 씨가 열살 즈음에 큰 오빠만 남기고 다시 가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후쿠오카다. 그곳에서 5년 가량을 보냈다. 국민학교도 다녔다. 처음에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생한 것을 빼고는 무척 즐거웠다. 사랑도 듬뿍 받았고 사는데 큰 어려움도 없었다. 한국에서 그렇게 건너간 사람이 많아 이방인으로 겪어야 할 서러움도 잘 모르고 생활했다.

일본에서 생활이 5년으로 그친 데는 임달순 씨 조모가 보내오는 편지 때문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아들이라고는 임 씨 아버지 뿐이었던 조모는 아들을 곁에 두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연신 편지를 보냈다. 결국, 임달순 씨를 비롯한 가족은 귀국길에 올랐다.

동이면 세산리에 돌아온 임달순 씨는 결혼 준비를 하며 평범한 시골 처녀의 일상을 보낸다. 음식 솜씨와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임달순 씨에게 다양한 선자리가 이어졌지만 아버지는 무척 가렸다. 금지옥엽 키운 딸을 아무에게나 시집보낼 수 없었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혼처가 동이면 금암리 박 씨네다. 홀시아버지에 일가친척도 없는 4대 독자 남편은 군인이었다. 상사였던 남편 박 씨를 친정아버지는 ‘무척 똑똑한 사람’이라고 좋아했다.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 걸렸지만 남편이 똑똑하니 괜찮을 거라 말했다. 그렇게 스물네 살에 결혼했다.

2시집살이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녹녹치 않았다. 더군다나 군인인 남편 근무지는 멀고도 먼 부산이었다. 시어머니는 없었지만 시아버지 시집살이도 만만치 않았다. 워낙 없는 살림인지라 고생도 이만저만 아니었다. 날이 추워지면 이십리는 족히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서 땔감을 구해 머리에 이고 왔다. 남의 밭뙈기를 얻어 잡곡 조금 심어 곡식으로 삼아야 했다.

이때만 해도 남편 박 씨를 먼저 앞세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몇 번 보지도 못한 남편은 준위 계급을 달고 얼마 있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임달순 씨가 스물여덟 살이었고 남편 박 준위는 스물아홉이었다. 임달순 씨와 네 살바기 아들 하나를 세상에 남겨두고 그렇게 떠났다.

남편의 죽음을 알린 이는 우체부였다. 그날 마당에 들어선 우체부는 행동이 무척 어색했다. 등기 수취인이 눈앞에 있어도 망설였다. 그러고는 등기를 대신 받아줄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당시만 해도 편지가 중요한 통신수단이었으니 시골 마을에 우체부가 나타나면 주변에 사는 마을 주민이 하나둘 모였다. 혹시 자신들에게도 온 기별이 있는지 궁금해서다. 마침 그중에 시댁 시아주버니뻘 되는 사람이 있었고 우체부는 그 사람을 집 뒤켠 굴뚝 밑으로 데려갔다. 잠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시아주버니가 나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위독하다는데….”

사실, 사망 통지서였는데 차마 죽었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다. 그길로 군용열차를 타고 남편이 근무했던 부산 군부대에 찾아갔다. 전쟁통도 아니었는데 남편이 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시절이 그랬다. 이미 화장을 끝낸 뒤였다. 맥없이 유골함을 들고 고향에 돌아왔다.

남편을 잃은 후 재가를 권유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들 때문이었다. 남편이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고 일년 남짓, 시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덩그러니 홀로 남아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낼 때, 대전에 살고 있던 동생이 시골에서 일하는 것마냥 대전에서 일하면 금방 부자가 되겠다며 삶터를 대전으로 옮길 것을 권유했다. 사람 많은 곳이 무서워 한사코 싫다고 손사래 쳤지만 막내 여동생은 계속 채근했다.

결국, 권유에 못이겨 아들을 옥천에 살고 있던 다른 여동생에게 맡기고 대전에 나왔다. 서른 살 즈음이었다. 처음 얻은 방은 인동 근처에 월세 1천 원 했던 작은 단칸방이었다. 발도 마음놓고 뻗지 못할 만큼 좁았다. 지금 인흥아파트가 들어선 마을이다. 당시에 하꼬방이 가득했다. 주인네와 함께 부엌을 써야하는 옹색맞은 곳이었지만 집세로 지불할 돈이 없었다. 집이 그리 넓은 것도 아니었다. 주인도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과 좁은 단칸방에 모여 복닥거리며 살았다. 그러니 세 얻어 사는 사람보다 주인네가 더 불편하고 궁핍할 정도였다. 심지어 임달순 씨가 밥을 지어먹을 때 주인네는 정부에서 받은 식량으로 죽을 끓여 먹을 정도였다. 남편 없이 아이들 다섯을 데리고 살아가야 하는 사정이니 뻔했다. 그때 시절이 그랬다.

임달순 씨가 시골 마을을 떠나 처음 시작한 일은 주변 시골마을에서 과일을 조금 떼다가 노점에 앉아 파는 일이었다. 장사가 하도 안 돼 팔지 못하고 남은 과일을 동생네 가져다 주고 퉁을 놓았다. 시골에 그냥 살았으면 남의 집 일이라도 해서 먹고 살았을 텐데. 이게 뭐냐며 말이다. 동생은 처음부터 잘되는 것이 어디있느냐며 한 1년만 참고 해보라고 다독였다.

그러다 시골에서 콩과 팥 등 잡곡을 사다가 인동 시장에 넘기는 일을 시작했다. 잡곡을 이고 시외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는 고된 일이었다. 지금 인동시장 인근 농협 자리가 시외버스터미널이었다. 힘들었어도 노점 과일장사보다는 나았다. 그러다 지금 인동상회에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가게를 산 것이 아니라 구전을 좀 떼주고 장사할 수 있는 공간을 임대한 것이다. 그시절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남자가 대부분인 시장통에서 장사를 벌인 젊은 새댁 사연이 누구라도 궁금했을 게다. 누군가 “아니, 젊은 새댁은 왜 여기와서 장사를 한댜?”라고 묻기라도 하면 그냥 무섭고 서러워 눈물이 나왔다. 가게에서 울 수 없어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 숨어들어가 눈물을 훔치고 나올 때가 많았다. 그렇게 울다 나오면 또 다른 사람이 똑같은 질문을 했다. 주변 사람이 “저 새댁은 무슨 말만 하면 울어서 말도 못하겄어.”라고 말할 정도였다.

몇 년 그렇게 장사를 하던 중에 본래 인동상회를 운영했던 주인이 가게를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인동시장은 장사가 잘 돼 가게를 사고 싶다고 맘대로 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략 40년 전, 1970년대 이야기다. 그러니 그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마침 고생하는 어머니를 두고 대학에 갈 수 없다며 아들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월급이 대략 11만 원 정도였다. 그 월급 중 차비 1만 원을 뺀 나머지와 임달순 씨가 버는 돈으로 이자와 원금을 갚기로 하고 새마을금고에서 300만 원을 빌렸다. 그 돈으로 임달순 씨는 가게를 인수했다. 마흔 조금 넘은 나이에 인동상회 주인장이 되었다. 아들 월급과 장사해서 번 월급으로 꼬박 삼 년동안 가게 인수 비용으로 빌린 돈을 모두 갚았다.

장사 규모가 커지면서 물건을 조달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옥천, 보은, 금산 등 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서 표시를 해 두면 장차가 알아서 인동상회까지 곡물 가마니를 실어다 주었다. 장차는 대전 인근 장터를 돌며 인동시장 상인이 사 둔 곡식을 전문적으로 실어다 주는 일을 업으로 삼은 화물차다. ㄱ, ㄴ, X. O 등 가게마다 표시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그 표시가 누구 것인지 다 알았다. 심지어는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 곡물을 사기 위해 인동시장을 찾는 상인도 이런 표시를 썼다. 이때 임달순 씨가 썼던 표시는 ‘세산’이었다. 임달순 씨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 이름이다. 대전 인근 어떤 장에서건 곡물을 사서 가마니에 ‘세산’이라고 표시해두면 인동상회에 정확하게 가져다 주었다.

이 당시 부산과 대구 등 먼 외지에서 찾아온 상인들은 인동시장 인근 여관에서 잠을 잔 후 아침 일찍 인동시장을 돌며 마음에 드는 곡식에 표시를 해두었다. 먼저 표시를 해둔 가마니는 흥정이 끝나기 전까지 다른 상인이 건드리지 않는게 불문률이었다. 이 작업은 가게 주인이 나오기 전에 대부분 이루어졌다. 좋은 상품을 선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먼걸음을 달려온 상인들은 애가 탔을 게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게를 돌며 마춤한 곡물을 찾아야 했다.

인동시장에는 도방(경비)이 있어 시장도 지키면서 일찌감치 문도 열어주었다. 표시를 해 두었어도 매매가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서로 생각하는 가격이 맞지 않아 흥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표시는 검은 먹물을 덧칠해 감췄다. 이를 ‘부순다’라고 표현했다. 매직이나 싸인펜 같은 필기구도 없었을 뿐더러 볏짚으로 짠 가마니에 먹물이 아니면 표시하기도 힘들었을 터다. 부산, 대구 등지에서 찾아올 정도로 큰 곡물시장이었던 인동시장에는 동네마다 있던 곡물 소매점 사람들까지 매일 드나들며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인동시장은 곡물 도매시장이었던 셈이다.

가게를 구하고 싶어도 자리가 나지 않아 살 수 없었던 인동시장은 이제 한산하다. 임달순 씨는 40년 넘게 출근한 인동상회에 오늘도 출근한다. 마수걸이도 못할 때도 있다. 그런 것이 더는 중요하지 않다. 홀로된 뒤에 다급함과 초조함은 지금 없다.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면 지금도 눈가에 눈물이 맺힐만큼 징글징글하지만 잘 지나왔다.

잘 커준 아들은 결혼해 잘 살고 있다. 1천 원 월세방에서 시작한 옹색한 대전살이였지만 30년 전에 산성동 택지 60평을 구입해 아들과 함께 번듯한 슬라브 2층 집을 지었다. 그곳에서 아들이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지금은 아들 부부, 손주 셋과 함께 산다.

인동상회 앞 포대에 담아 놓은 보리와 콩, 흑미, 깨 등은 티끌 하나 없이 정갈하다. 팔아야 할 곡물이 들어오면 죽 펼쳐놓고 곡물에 섞인 팃검불을 걷어낸다. 알갱이가 깨져 볼품없는 것도 찾아낸다. 잔손이 무척 많이 가는 일이다. 콩 종류는 그렇다치고 그 작은 깨도 손으로 일일이 고른다.

그리도 정갈한 곡물을 펼쳐 놓은 ‘인동상회’는 무척 좁다. 가게 한 켠에는 사각형 기둥도 떡 하니 박혀 있다. 칸을 쪼개고 쪼갠 한 평 남짓한 공간이다. 그 좁은 공간에서 한 사람의 인생 전부가 고스란히 담겼다. 함부로 넘나들 공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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