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가 막 눈을 뜬다
긴 하루가 막 눈을 뜬다
  • 글 사진 이수연
  • 승인 2013.11.15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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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르타주_ 새벽 5시 30분 판암~반석행 지하철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라기보다는 어쩌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시간이다. 늦은 새벽까지 반가운 친구를 만났거나, 엄청난 일 더미를 만났거나, 한잔 술을 오랫동안 만난 것이 떠오른다. 새벽 5시 30분은 그런 것만 떠올린다. 어느 새까만 새벽, 방에 불을 켜도 몸엔 재깍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옷을 아무리 두껍게 껴입어도 으슬으슬 떨리는 것은 아직 잠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춥지 않으세요?”라고 말을 붙였던 새벽,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다.

지하철 문이 열린다
몸을 웅크리고, 지하철역 계단을 쏜살같이 내려갔다. 대전광역시 동구에 있는 지하철 판암역이 문 여는 시간은 새벽 5시다. 대전광역시에는 지하철 1호선이 있고, 동구 판암역에서 유성구 반석역까지 합해 총 22개 역을 지난다. 판암역에서 첫차가 떠나는 시간은 5시 30분이다. 5시 15분, 문이 열린 지하철 안에 벌써 자리 잡고 앉은 사람이 꽤 있다. 어제부터 시작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보다는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더 많다. 눈을 비비고, 자리에 앉자마자 고개를 숙인 사람도 있고,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동그랗게 만지며 앉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거나 눈을 돌리며 사람들을 살피기도 한다. 총 네 개 칸으로 나뉜 지하철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이 자리를 채웠다. 지하철 안에 탄 사람들의 수다가 이어져 더 꽉 찬 느낌이다.

인사소리가 들린다. 이미 타고 있던 두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는 “어제 그 사람 쉰 모양이더만.”이라며 아직 탑승하지 않은 사람을 걱정한다.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5시 30분 바로 직전 아슬아슬하게 지하철에 탄다. 비어 있던 그들의 옆자리에 남자가 비집고 앉는다. 남자가 앉자마자 지하철이 출발한다. “어제는 화장실 가느라 놓쳤어.”라고 말하는 남자. 한 줄 의자에 여섯 명이 옹기종기 붙어 앉았다. “그러니까 어떻게 지하철 시간을 딱딱 맞춰 와? 나는 불안해서 그렇게 못 와. 한참 전에 타 있어야지.”라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서로 오래 알아온 사이는 아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역에서 지하철을 타다 보니 한두 마디 건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매일 얼굴 보며 인사하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됐다. 50대 중반에서 후반까지의 나이다. 내리는 역은 서로 다르다. 하는 일도 모두 다르다. 지하철 타고 내릴 때 인사하는 그들은 함께 일하는 동료 같다.

하루하루를 몸에 새긴다
문을 닫고 출발하기 전, 지하철에선 계속 낮은 ‘뿌’ 소리가 난다. 급하게 지하철에 타는 남 씨 할아버지는 은퇴 후 건물 관리인으로 취직했다. 하루 일하고, 하루 쉰다. 오전 6시까지 출근해 다음날 오전 6시에 퇴근한다. 격일제 근무는 고단하긴 하지만, 일할 곳이 마땅치 않다. “내가 젊어 보여요?”라고 말하는 남 씨 할아버지는 70대다. 급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긴 하루를 마무리한다. 일하는 날은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느낀다.

지하철은 두 번째 역인 신흥역에서 자리가 거의 다 찼다. 여자들도, 남자들도, 들고 있는 짐이 꽤 된다. 대부분 50대에서 70대 사이로 보인다. 유난히 얼굴이 까만 김 씨 아저씨는 가는 내내 얼굴이 무거웠다. 김 씨 아저씨는 공사현장으로 가는 길이다. 가방엔 갈아입을 옷과 도구 몇 개가 들었다. 매일 들고 다니는 거라 그렇게 무겁진 않다. 그냥 무거워 보일 뿐이다. 김 씨 아저씨의 인생도 무거워 보일 뿐이지 그렇게 무겁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있으면 나가고, 없으면 나가지 못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김 씨 아저씨처럼 커다란 가방을 든 사람이 많았다. 도시락 가방도 있고, 무언지 모르지만, 커다란 가방을 등에 메거나 어깨에 메고 지하철에 탔다. 잠깐 스친 어떤 이에게서 비릿한 담배냄새가 났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얼굴만큼 세월 따라 남는 것이 냄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냄새가 났다. 담배 냄새, 밥 냄새, 차가운 바람이 스친 냄새도 제각기 달랐다. 나이가 들수록 한 사람의 냄새는 많이 날아가지 못하고 꾸덕꾸덕 자신에게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세월이 묻은 냄새가 킁킁거릴수록 진하게 풍겼다. 첫 지하철에는 그렇게 덕지덕지 붙은 세월을 안고 타는 사람이 많이도 있었다.

눈을 뜬 하루에서 다양한 것을 본다
세 번째 역인 대동역, 아직 서 있는 사람이 많진 않다. 정 씨 아주머니는 도시락 가방을 손에 들고, 일터로 향한다. 새벽 6시에 유성온천역에 도착해야 한다. 유성온천역 근처에 있는 건물, 그곳에서 60대인 정 씨 아주머니는 청소를 한다. 오전 4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씻고, 대충 반찬 몇 가지를 넣어 도시락을 싼다. 유성온천역에 6시에 도착하면 오후 4시까지 건물에서 보낸다. 자는 시간은 대중없지만 일어나는 시간은 항상 같다. 그렇게 그녀가 아침을 연다.

꽃분홍 옷을 입은 정 씨 아주머니와 비슷한 옷차림이 많다. 새벽 지하철은 알록달록 색의 향연이다. 할머니들은 주로 붉은색이나 분홍색, 푸른색 계통의 옷을 입었다. 김 씨 할머니도 진한 분홍색 옷을 입었다. 손에 든 가방이 도시락이냐 물었더니, 목욕 가방이라며 웃는다. 김 씨 할머니는 목욕 가는 날이면 항상 첫 지하철을 탄다. 진지한 표정으로 “지금 가야 목욕탕 물이 좋아.”라고 말한다. 넉살이 좋아 첫 지하철 타는 사람과 대화도 자주 나눈다. 미처 자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서서 가는 사람은 불러서 자리를 알려주기도 한다. “이 시간에는 거진 일하러 가는 사람이야~”라며 서대전역에서 내리는 할머니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 할머니는 김 씨 할머니와 같은 동네에 산다. 부자인데도 매일 전단 돌리고, 폐지 줍는 일을 한다고 한다. 새벽 지하철엔 자기 자리 말고도 남의 자리도 챙기고, 이 사람 저 사람 정답게 말 붙이는 할머니들이 종종 보인다.

친구도 만나고, 꿈도 꾼다
첫차를 함께 탄다는 것은 묘한 동질감을 주는 모양이다. 항상 대전역에서 타는 60대 박 씨 아저씨도 함께 타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매일 함께 타던 40대 중국 여자가 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아 아픈 건 아닌지 걱정이다. 여자가 철근 일을 한다기에 놀라서 몇 번을 물었다. 여자는 박 씨 아저씨와 같은 역에서 타 같은 역에서 내린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말을 붙였고, 어쩌다 보이지 않으면 “왜 그럴까?” 걱정하는 아침 친구가 되었다.

“새벽에 다니는 것 보면 다 정직하게 사는 분들이에요. 열심히 살잖아요. 이 시간에 나와 종일 일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박 씨 아저씨도 아파트 경비 일을 시작한 지 3개월째다. 아파트 경비일 역시 격일제 근무다. 오늘 출근하고, 내일 퇴근한다.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다. 24시간 깨어 있는 것이 그렇게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금세 적응했다. 박 씨 아저씨 역시 나이 때문에 오래 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지만, 지금은 참 감사하다.
박 씨 아저씨는 “이것저것 경험하고, 사람을 만나면서 아직도 배우죠.”라고 말한다. 젊은 시절에는 식당을 오랫동안 했다. 식당 그만두고 아파트 청소, 아파트 경비, 공사 현장 등 많은 곳에서 일했다. 일하며 배운 것을 바탕으로 더 좋은 식당을 운영해보고 싶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즐겁다. 박 씨 아저씨는 꿈이 있었다.

금방 새벽이 지나갔다
월요일 첫차에서는 많이 볼 수 없었던 젊은이들이 금요일 첫차에선 종종 보였다. 밝은 갈색 머리에 검은색 옷을 입은 20대 여자가 할머니들 사이에 앉았다. 앉자마자 콘택트렌즈를 빼고, 눈을 감았다 뜬다. 여자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여자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영어 학원 새벽반에 다닌다는 남자도 있었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고, 귀에 이어폰을 꽂는 남자를 보니 첫차에서는 이어폰 낀 사람을 자주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낯선 모습이었다.

반석역에 도착하니 6시 10분이었다. 밖을 나가보니 아직 어둠이 채 가지 않았다. 6시 38분, 반석역에서 다시 판암역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은 조용했다. 친구로 보이는 젊은 여자 둘만 재잘대기 바빴다. 귀에 이어폰 낀 모습이 다시 익숙해진다. 알록달록 진한 꽃분홍색 옷을 입은 할머니들은 가끔만 보였다. 30년 정도 지나면 어떤 냄새를 풍길 수 있을까, 잠깐 생각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아침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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