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잊고 살았다, 아직 난 현역이다
나이를 잊고 살았다, 아직 난 현역이다
  • 글 사진 송주홍
  • 승인 2014.01.1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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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가 만난 사람_민요연구가 이소라 박사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30년 세월. 그 시간동안 그녀는 40권도 넘는 책과 90여 편의 논문을 썼다. 이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다. 뿐만 아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30여국을 다녔다. 특히 중국과 일본은 몇 년에 걸쳐 수차례 왔다 갔다 했다. 민요연구가 이소라 박사, 한국 나이 70.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현역”이라고 말한다.


서울대 법대생, 음악을 택하다
“제가 서울대 법학과 들어간 게 1963년이니까요. 그 당시만 해도 서울대 법대라고 하면 알아줬죠.”
애초에 돈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 편에 서고 싶었을 뿐이었다. 근데 적성이 맞지 않았다. 음악 좋아하고, 사색하고 철학하는 거 좋아했던 이소라 박사에게 무조건 외워야하는 고시 공부는 영 내키지 않았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 음대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2년을 수료하고, 그 뒤로 10년 넘게 국악을 연구하고 공부했어요.”
전국의 장인을 찾아다니며 해금과 거문고, 가야금, 춤(굿거리, 살풀이, 성좌춤, 무당춤, 봉산탈춤 등) 등 국악의 모든 것을 몸으로 익혔다. 그리고 서울음대 대학원에서 국악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소라 박사는 ‘국악인’이었다. 스스로도 민요를 연구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이소라 박사가 민요를 접하게 된 건 1983년 문화재청(당시 문화재관리국) 전문위원으로 재직하면서다.
“큰 포부가 있었다기보다는 전공 살려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들어간 거예요.”

이소라 박사가 문화재청에서 맡은 업무는 전국의 농요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거였다. 새로운 농요를 발굴해서 지정하는 게 아니라, 이미 선별해놓은 농요를 직접 들어보고 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는지 평가하는 역할이었다. 그 첫 번째가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통명리의 농요였다.

“조사하고 바로 왔으면 여태 그냥 그렇게 살았을 텐데, 조사 끝나고 군청에 갔더니 직원 한 분이 절 부르는 거예요. 이웃면이 풍양면인데, 그 동네는 전혀 다른 농요를 부르니까 같이 가서 들어보겠느냐는 거예요. 좋다고 하고 따라나선 거죠.”

풍양면 노인정에 갔더니 어르신들이 가득했다. 어르신들은 직원 말마따나 전혀 다른 농요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그 농요를 듣고 서울로 돌아오며 이소라 박사는 많은 생각을 했다.

“바로 옆 동네인데도 농요가 전혀 다르잖아요. 그것이 궁금하기도 하고, 농요를 이대로 그냥 놔두면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음이 급했어요. 발등에 떨어진 불 끄듯이 서울에 오자마자 농요보존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전국의 농요를 조사하기 시작한 거죠.”

▲ 나요당 민요집

농요를 집대성하다
“농요는 크게 모심는 소리와 논매기 소리가 있는데, 급한 게 바로 논매기 소리였어요. 우리나라에 제초제가 들어온 게 1960년대인데, 제초제가 들어오면서 그전처럼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논 맬 필요가 없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논매기 소리도 없어진 거예요.”

이소라 박사가 본격적으로 농요를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 1984년이었으니, 그때도 이미 마을에서 농요가 사라진지 20년이나 지난 후였다. 조사하러 다니며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이소라 박사는 전국 각 시.군의 각 읍.면에서 적어도 농요 1개씩은 찾아내자는 다짐으로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조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죠.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없어진지 20년이 지난 상태였으니까요. 각 시?군청에 협조 받으려고 물어보면 자신들 관할구역엔 농요가 없다고 해요. 농요가 뭐냐고 묻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때마다 이소라 박사는 일단 노인정까지만 안내해달라고 말했다. 노인정에 가면 무조건 상여소리 선소리꾼을 찾았다. 말하자면 그 사람이 ‘키플레이어’였다.

“그때까지 그래도 마을마다 상여소리는 남아있었어요. 그러니까 상여소리 선소리꾼을 찾는 거예요. 보통은 마을에 선소리꾼이 한 사람이에요. 말하자면 그 사람이 마을의 가수인 거죠. 그 선소리꾼이 상여소리뿐만 아니라 모심는 소리, 논매기 소리를 다 했었던 거니까 그 사람만 찾으면 됐던 거죠. 노인정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대부분의 사람은 농요를 기억하지 못했어요.”

바꿔 말하면 선소리꾼이 이미 죽거나 없는 마을은 농요를 찾을 방법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 당시에도 이미 선소리꾼 평균 연령이 70세 내외였다. 선소리꾼 없는 마을도 제법 있었다.

“한 번은 전라도 부안군 백산면에 갔어요. 넓은 평야지대더라고요. 그런 지역일수록 보통 아주 길고 좋은 논매기 소리가 나오거든요. 그 주변 다른 지역에서도 좋은 농요를 수집했었고요. 근데 백산면에 위치한 마을 여기저기를 다녀도 선소리꾼이 없는 거예요. 몇 번이나 갔는데도 그렇더라고요. 결국 온전치 못한 자투리 농요만 구할 수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이소라 박사는 조금 더 일찍 농요를 조사해놓지 않은 현실이 안타까웠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각 읍.면뿐이 아니라 더 좁은 권역인 각 리(里) 별로도 조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아쉬웠다는 거다.

어쨌든 이소라 박사는 1984년부터 1989년까지 6년여에 걸쳐 전국에 있는 농요를 전부 조사했다. 카세트로 소리를 녹음하고 농요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정리해 책으로 엮기 시작했다. 그렇게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세상에 내놓은 것이 <한국의 농요> 제1~5집이다. 그렇게 일단락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소라 박사는 다시 한 번 수차례 전국을 돌며 농요, 동요, 상여소리 등 민요를 심층 조사했고, 그 내용이 이소라 박사가 지금까지 펴낸 40여 권의 책과 90여 편의 논문에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 민중의 살아있는 역사
그렇다면 이소라 박사가 주목하는 민요의 가치는 무엇일까. 이소라 박사는 “민요는 우리 민중의 살아있는 역사다.”라는 말로 대신했다. 농사라는 것은 과거부터 민중의 먹고사는 문제였다. 그 자체로 삶이었던 것이다. 민요는 그 먹고살기 위한 과정에서 불렀던 노래다. 그 노랫말과 멜로디에 우리 민중들의 삶, 애환이 담겨있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더욱이 민요에는 일종의 권역이 존재한다. 어딘가에서 시작한 민요는 그 주변으로 퍼지는데, 과거에는 교통이 불편하다보니 민요가 산과 강을 건너지는 못한다. 같은 민요를 부르면 한 생활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소라 박사는 이것을 ‘민요권’이라고 표현했다.

“쉬운 예로 제가 민요를 조사한 계기였던 경상북도 예천군의 풍양읍과 통명리는 아주 가까워요. 근데도 두 지역의 민요는 전혀 달라요. 두 지역 사이에 낙동강이 흐르기 때문이에요. 지역은 붙어있지만 다른 민요권인 거죠. 그런가하면 전혀 엉뚱하게 경상남도 의령군 민요와 천안시 몇몇 지역의 민요가 아주 유사해요. 언젠가 의령과 천안 사이에 집단이주가 있었다는 얘기겠죠. 지역은 한참 떨어져 있어도 같은 민요권인 거예요.”

삶이 담겨 있다는 것, 그 삶들의 권역과 이동을 유추해볼 수 있다는 것 등. 이소라 박사는 민요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한국학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기초자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물은 한정적이고 제한적이잖아요. 민요는 제가 전국적으로 전부 조사를 끝냈기 때문에 필요하면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잖아요.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후학들의 몫이겠죠.”

우리나라 민요의 뿌리를 찾아서
이소라 박사는 전국 농요 조사를 끝냈던 1989년부터 시선을 밖으로도 돌렸다. 일본을 시작으로 한반도 주변국을 샅샅이 조사하고 다녔다.

“제가 1989년 일본에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중국, 미얀마,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몽골 태국, 필리핀 등 심지어 터키까지 한반도 주변국의 민요를 조사했어요. 우리나라는 애초에 자생 벼가 없었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전해 받은 재배 벼예요. 그렇다면 벼를 전해 받는 과정에서 모심는 노래도 함께 전해 받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던 거죠.”

정리하면 이소라 박사는 ‘우리나라 민요의 뿌리가 자생인지, 어딘가에서 전파 받은 건지’를 알아내기 위해, 어떻게 보면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과 여러 가지 조사 과정을 거쳤는데,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인도와 우리나라의 민요가 관련이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근데 저 혼자 조사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일단 자국에서 한 번이라도 조사한 적이 있어야 그것을 바탕으로 비교 조사를 할 텐데, 인도에서 자체적으로 민요 조사한 적이 없으니까 애를 먹고 있는 거죠.”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소라 박사는 반평생 민요와 함께 했다. 단지 ‘재미’가 있었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무언가 하나는 해놓고 가야하지 않겠냐는 작은 소망이었다. 그래서 이소라 박사는 덤덤히 말한다.

“아직 난 현역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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