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뉴스 이성현 기자] 그동안 치매를 악화시키고 뇌세포를 손상시키는 주범으로 꼽혀온 독성 부산물이 오히려 치매를 치료하는 ‘약물 작동 스위치’로 변신했다.
국내 연구진이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에서 비정상적으로 급증하는 유해 물질을 역이용해 병든 부위에서만 선택적으로 치료 효능을 발휘하는 획기적인 차세대 치매 치료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화학과 임미희 교수 연구팀이 전남대, 한국생명공학연구원(KRIBB),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과 공동 연구를 통해 알츠하이머병의 병리 환경에서만 활성화되는 전구약물(Prodrug)을 개발하고 동물실험을 통해 치료 효과를 입증했다고 2일 밝혔다.
알츠하이머병은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의 응집, 금속 이온 불균형, 활성산소종 증가에 따른 산화 스트레스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발생하는 난치성 질환이다.
이 과정에서 세포를 손상시키는 과산화수소가 과도하게 생성되는데 기존의 항산화 치료 전략은 이를 단순히 제거해야 할 유해 물질로만 취급해 왔다.
연구팀은 이러한 고정관념을 뒤집어 과산화수소를 전구약물의 활성화 시점과 장소를 결정하는 ‘내재적 화학 신호’로 활용하는 역발상 전략을 고안했다.
전구약물이란 투여 초기에는 아무런 약효가 없다가 체내의 특정 환경에 도달해야만 활성형 치료제로 변하는 약물을 뜻한다. 공동 연구팀은 활성형 소분자의 핵심 구조를 붕소 기반 보호기로 일시적으로 가려 정상적인 환경에서의 불필요한 반응성을 대폭 낮추고 안정성을 높였다.
이렇게 설계된 전구약물은 건강한 조직에서는 전혀 반응하지 않다가 과산화수소가 풍부한 알츠하이머병 병리 환경과 마주하는 순간 과산화수소를 스스로 소모함과 동시에 활성형 치료 물질로 변환돼 ‘치료 스위치’를 켜게 된다.
연구팀이 개발한 스마트 전구약물은 치매의 핵심 원인 인자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제어하는 탁월한 효능을 보였다.
첨단 분석기술을 통해 관찰한 결과, 과산화수소에 의해 켜진 활성 물질은 뇌 속에 쌓여 신경세포를 죽이는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단백질의 특정 아미노산 잔기를 산화시키거나 공유결합성으로 변형시켜 이들이 서로 뭉쳐 독성이 강한 두껍고 긴 섬유상 응집체(단백질 덩어리)로 자라나는 경로를 완전히 차단한 것이다.
이러한 분자 수준의 조절 효과는 실제 살아있는 생체 내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됐다.
연구 과정에서 가장 큰 난제는 시험관 내부의 화학적 원리가 실제 복잡한 생체 환경에서도 작동하는지를 검증하는 것이었다. 연구팀은 대표 화합물인 BE-1을 알츠하이머병 모델 생쥐에게 투여한 결과 약물이 혈액-뇌 장벽을 안정적으로 통과해 실제 뇌 조직 내에서 활성형 물질로 완벽하게 전환되는 증거를 확보했다.
장기간 약물을 투여받은 치매 생쥐들은 기억을 관장하는 핵심 부위인 해마의 산화 스트레스가 눈에 띄게 감소했으며 뇌 속 아밀로이드 베타 축적량도 현저히 완화됐다.
특히 새로운 물체를 인식하거나 미로에서 길을 찾는 행동 실험에서도 정상 생쥐 수준으로 인지 능력과 공간 기억 능력이 대폭 개선되는 치료 효과를 나타냈다.
이번 연구 성과는 특정 단백질 하나만을 공격 목표로 삼아 효능이 제한적이고 부작용 우려가 컸던 기존 단일 표적 치매 치료제들과 확실한 차별성을 갖는다.
질병이 발생한 부위의 고유한 화학적 특성을 역이용해 약이 필요한 장소에서만 켜지도록 정밀하게 설계했기 때문에 치료 효율은 극대화하면서도 정상 조직에 미치는 독성이나 부작용은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연구팀은 현재 단계가 치료제 상용화 단계가 아니라, 병리 환경에서 작동하는 전구약물 전략의 원리를 세계 최초로 검증하고 후보 전략을 제시한 ‘원리 검증’ 단계라고 설명했다.
향후 실용화를 위해서는 화합물의 뇌 전달성과 체내 안정성, 약동학적 특성, 장기 안전성 및 독성 평가, 최적 투여 용량 설정 등 체계적인 후속 전임상 연구가 필수적이다.
임미희 교수는 “이번 연구는 그간 뇌세포 사멸의 주범이자 제거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과산화수소를 약물을 정밀하게 작동시키는 긍정적인 신호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화학 및 의학계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며 “병든 조직에서만 선택적으로 활성화되는 이 기술은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복합 질환을 안전하게 다스리는 차세대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향후 전구약물의 구조를 한층 더 정교하게 최적화하는 한편 산화 스트레스와 단백질 응집이 동시 다발적으로 관여하는 파킨슨병 등 다른 신경퇴행성 질환 및 다양한 염증성 질환 분야로도 이 정밀 치료 플랫폼 기술을 적극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