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세월이 빚어낸 정직한 기타 선율
40년 세월이 빚어낸 정직한 기타 선율
  • 글 송주홍 사진 정종대
  • 승인 2014.02.28 11: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토마토가 만난 사람_클래식 기타리스트 강찬주

지난 1월 25일 관저문예회관에 기타 선율이 울려 퍼졌다. 담백한 선율이었다. 그래서 불현듯 밀려오는 울렁임이 당황스러웠다. 깊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비단 테크닉이라든가 기교의 차이만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무언가, 아마도 40년이라는 시간이 빚어냈을 어떤 무엇…. 어쩌면 40년이라는 시간,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40년이라는 그 절대 시간 앞에 기타 선율은 정직했다. 연주회가 끝날 때까지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다. 클래식 기타리스트 강찬주(55) 씨는 평온하고 조용히 무대를 마무리했다.


영원한 친구와의 만남
"영원한 친구? 어쩔 때는 나에게 감동을 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고, 한계에 부딪힐 때는 이제 그만 떨쳐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 기타를 잡게 돼요. 아마도 손가락 움직일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는 해봐야하지 않을까 싶어요. 기타라는 게 끝이 없는 거니까요."

1972년. 양희은, 송창식, 김세환 등 포크송 가수가 한창 인기를 끌던 때였다. 누구든 기타 살 돈만 있으면 통기타를 둘러메고 다녔다. 그런 시절이었다. 어느 날 두 살 터울 친형이 통기타 하나를 집에 가져왔다. 14살 어린 소년에게 통기타는 좋은 친구였다. 기타를 가르쳐주는 사람도, 마땅히 배울 곳도 없었지만, 낮이고 밤이고 기타 줄을 퉁겼다.

"남들보다 기타에 애착이 강했던 것 같아요. 남들 기타 치는 거 보고 따라 하기도 하고, 서점에서 포크송 책 사다가 독학도 했죠."

그러기를 2년 여, 그때까지만 해도 소년에게 기타라고 하면 통기타가 전부였고, 그걸로 할 수 있는 건 반주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로망스'라든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같은 클래식 음악과 이를 연주하는 클래식 기타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소년에게 클래식 기타라는 것은, 독주가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감동이었다. 그 감미로운 선율이 좋았다. 서툰 손가락을 한 마디 한 마디 옮기며 열심히 클래식 연주곡 멜로디를 따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멜로디를 흉내 내는 정도였던 것 같아요.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기타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죠."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당시 원동 사거리에 예림음악학원이라는 곳이 있었다. 학원 원장님이 당시로썬 대전에서 클래식 기타의 선구자 같은 사람이었다. 열일곱 소년은 악보를 읽고 해석하고,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는 방법에 관해 하나씩 배웠다. 독학으로 배웠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음악세계를 비로소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처음 '내 기타'를 갖게 됐다. 지금으로 따지면 100만 원 상당의 고가 수제기타였다.

"지금처럼 치열한 경쟁시대가 아니었어요. 사회 분위기가 그래도 낭만을 찾던 시대였으니까요. 기타 제대로 배우고 싶다니까 부모님이 흔쾌히 사주신 거죠. 그때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있나요?"


스페인행 비행기
고등학교 내내 음악학원에 다닌 소년은 군대에 갔다 와서 청년이 된 후에도 음악학원에 마음을 기댔다. 학원비를 내는 대신 원장님 보조로 다른 초보자들을 가르쳤다. 그런 일상이 좋았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즉석에서 합주도 하고, 1년에 한 번 대전시민회관에서 연주회도 했다. 기타 선율의 매력에 푹 빠져 지냈다. 아름답고 평온하고, 감동적인 나날이었다.

"그쯤 원장님 소개로 교수 한 분을 만났어요. 평택대학교 전신인 피어선신학교라고 있는데, 80년대 초반 전국 최초로 그 학교에 기타과가 생겼거든요. 거기 교수님이셨어요."

청년의 기타 열정을 알아본 교수는 청년에게 스페인 유학을 권유했다. 스페인에 마드리드왕립음악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한 번 배워보면 어떻겠느냐는 권유였다. 80년대 초, 일반적인 유학도 드문 시절이었다. 기타를 배우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난다는 건, 청년에게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더욱이 무작정 스페인에 간다고 해서 마드리드왕립음악원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엄격한 실기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고민 많이 했죠. 단순히 스페인을 가냐, 안 가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처럼 그냥 기타를 취미로 하느냐, 평생의 업으로 삼느냐의 문제였거든요. 고민 끝에 이왕 시작한 거 본고장 가서 배워보자고 결심한 거죠."
그렇게 스페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의사소통이 걱정이긴 했지만 크게 두려울 건 없었다. 그저 멋진 기타 연주가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시 마드리드왕립음악원에는 외국인을 위한 편입시험제도가 있었다. 심사위원 3명 앞에서 자유곡 2~3곡을 연주하는 방식이었다. 전체 8년 과정에서 청년은 5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음악원에 들어가서 청년이 느낀 건 음악의 길이 멀고도 험하다는 것이었다. 본고장에서의 교육은 엄격하고 체계적이었다. 수업이 많지는 않았지만 매주 실기 시험이 있었고, 매년 진급시험을 치러야했다. 청년은 하루 6시간 이상 혹독한 연습을 해야 했다. 그렇게 음악원에서 5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2년을 더 스페인에서 머물렀다.

"한편으로는 힘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스페인에서의 생활이 즐거웠어요.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나머지 2년은 기타 하나 둘러메고 스페인을 떠돌아다녔어요. 여행도 다니고, 유명한 연주자들이 하는 마스터클래스 찾아다니면서 기타도 배우고요."

좌절, 또 좌절
32살, 8년여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1991년. 청년의 귀국은 단순한 귀국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기타 유학 1세대의 귀국이었다. 마드리드왕립음악원에서 수학했다는 건 당시로썬 엄청난 경력이었고, 실제로 함께 유학했던 이들 중 몇몇은 저명한 대학에 교수로 초빙되기도 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순 없다. 어쨌든 청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학벌을 내세워 돈을 번다면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기는 하겠지만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반인이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음악을 어느 정도 했다는 사람은 자기 실력을 잘 알아요. 스스로를 속이면서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어요."

기타 유학 1세대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은 화려한 삶 대신, 일반인에게 기타를 보급하자는 마음으로 홍대 앞에서 소소하게 레슨을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청년은 압구정, 잠실 등을 오가며 클래식 기타 레슨 작업실 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문제는 늘 운영난이었다. 청년이 기타를 만나고 기타의 꿈을 키웠던 70~80년대와 달리 90년대로 오며 클래식 기타는 대중에게 더 이상 '신선한 감동'이 아니었다.

"90년대 중후반으로 가면서 일렉트로닉 문화가 퍼지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어쿠스틱 문화가 쇠퇴하기 시작한 거죠.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던 거죠."

수차례 작업실 문을 닫으며 경제적으로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로 들어갔다. 그렇다고 기타를 포기하는 건 아니었다.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기타를 꼭 서울에서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청년은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도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간간히 손님을 초대해 자그마한 음악회도 열었다. 그렇게 약 10년의 세월을 청년은 시골에서 유유자적하며 보냈다.

머나먼 길을 걷는 수도승처럼
2008년, 강찬주 씨는 더 이상 순수한 소년도, 꿈 많던 청년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타에 관한 열정만큼은 처음과 같았다. 아니, 더욱 커져만 갔다.

"언젠가부터 나이를 먹으니까 젊을 때보다 세밀한 테크닉에서 자꾸만 퇴보하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농사지으며 활동하는 게 어렵기도 했고요. 더 늦기 전에 기타에 관한 열정을 되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거죠."

그때부터 강찬주 씨는 방과 후 교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하루 4시간 이상 기타 연습에 매진했다. 작년 12월에는 오랜만에 독주회도 열었다.(인터뷰 후 1월에도 연주회를 열었다.) 앞으로도 틈틈이 독주회를 이어갈 계획이다.

기타를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하고 스페인행 비행기에 몸을 싣던 그때부터 단 한순간도 삶이 순탄치 않았다. 수차례 작업실 문을 닫아야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시골생활도 해야 했다. 그때마다 쓰라린 좌절을 맛봤다. '그만해야 하나?'라는 고민도 수없이 많이 했다. 그럼에도 기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음악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을 잊을 수 없어서였다. 멋진 음악을 들으며 가슴 속에 새긴 수많은 감동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음악을 통해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거 하나였다. 그래서 강찬주 씨에게는 마지막 목표 하나가 더 있다. 스스로 감동할 수 있는 음악을 해보는 것이다. 그래야 남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도 감동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감동을 준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음악이라는 게 참 끝이 없는 것 같아요. 머나먼 길을 걷는 수도승의 마음처럼 그저 최선을 다해보는 것뿐이에요. 그러다보면 내 음악에 스스로 감동하는 날이 오겠죠."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충청뉴스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